퇴사일자를 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항공권 검색입니다. 가 봤던 도시, 한 번쯤 가보고 싶었지만 내내 인연이 닿지 않았던 도시들을 순서대로 검색했어요.
퇴사 후 여행은 특별하잖아요. 다음 주의 내가 해야 할 일을, 이번 주의 내가 당겨서 하고 가는 여행이 아니니 컨디션이 좋을 테죠(야근행진하고 떠난 여행에서 꼭 병이 났던 사람). 꼭 돌아와야 하는 날짜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일정도 여유롭겠죠. 돌아오자마자 해결해야 할 업무도 없으니- 얼마나 산뜻해요.
그런데 제 마음은 이상하게 피로하기만 하더라고요.
항공권 검색결과를 가격과 소요시간 순으로 정렬해 보고, 경유 여부나 항공사별로 필터도 걸어보는 그 짜릿한 순간. 그 도시에 가면 들를 곳, 먹을 것, 할 것을 검색하며 메모하는 순간. 준비물을 체크리스트로 만들다가 '에라이, 없으면 가서 사지 뭐. 카드만 있으면 된다고!' 하고 대충 마무리하는 순간. 그 좋았던 순간들이 설레기는커녕 마냥 귀찮더라고요.
이 피로함과 귀차니즘을 타파하고 떠난다면, 분명 좋을 거란 건 알아요. 여행은 늘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여행이 끝난 후, 다시 이 복잡하고 발 디딜 틈 없는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여행은 돌아온 후에야 완성되는 것이니까요.
저는 여백이 생긴, 지금 여기의 일상을 여행하듯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여행지에서 맞는 하루하루처럼 소중히요. 그 매일동안 삶을 단정히 하는 일들을 해나갈 거예요.
이 여행지는 아주 익숙한 곳입니다. 저는 친절한 바리스타가 있는 아늑한 카페를 알고, 멋진 공원을 알아요. 구글맵을 켜지 않고도 갈 수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숙소도 있어요. 거기에는 '소망이'라는 사랑스러운 고양이도 있답니다.
대신 이런 것도 있어요. 오래된 음식이 잔뜩 들어서 열기도 싫은 냉장고, 계절 지난 옷이 잔뜩 쌓인 옷장이요. 한두 번 쓴 핸드크림이 널려 있고, 먼지가 슬며시 쌓인 화장대도요.
편안한 것들은 찬찬히 누리고, 보내주어야 할 습관과 물건들은 차분히 보내주려 해요. 여분을 많이 소유하지 않는, 여행자의 마음으로요. 일상을 여행하기로 결정한 것은 삶을 가볍고 단출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원하는 것을 향해 꿋꿋이 달릴 수도, 넘어지면 재빨리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벌써 여행지에서 맞는 두 번째 주간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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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이 실제 쓰인 일자는 2023년 2월 13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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