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아찌 통을 엎었다
얼마 전 고모가 반찬을 잔뜩 챙겨 주셨다. 배추 겉절이, 총각김치, 양파 절임, 열무김치 등 냉장고가 가득 찼다. 반찬을 받아 오는 날은 자연스럽게 냉장고 정리의 날이 된다. 정리가 시작됨과 동시에 기억력 검사가 시작된다.
'이건 누구한테 받았더라,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먹어도 되는 건가?'
먹던 반찬들은 작은 통으로 옮겨 담고 오랜 시간 손을 대지 않았던 것들은 과감히 버린다. 버릴 것이 한가득 나왔다. 아까운 데 그냥 둬볼까 생각하는 순간 버리는 것이 맞다. 여태까지 먹지 않은 거 지금 눈에 띈다고 해서 다시 손이 갈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리된 반찬통에는 오랜만에 라벨링도 했다. 2024년 김장 김치, 2023년 김치, 묵은 김치 등등. 고모가 준 반찬 덕분에 오랜만에 냉장고 정리를 하고 나니 큰 일 하나 한 거 같아 기분이 개운하다.
오늘은 저녁을 먹고 다용도실을 소소하게 정리할 생각이었다. 거창할 것도 없었고 그냥 소소한 정리였다. 정리를 하기 전 이전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고추 장아찌 통이 보였다. 냉장고에 오랜 시간 있었는데 왜 이제야 항아리 모양의 그 통이 거슬리기 시작했는지 옮겨 담아야지 싶었다. 장아찌 상태는 괜찮은 지 확인을 하고는 주방 싱크대에서 옮겨 담을 참이었다. 그리곤 대참사. 장아찌 통을 엎었다.
돌려서 여닫는 통이었는데 상태를 확인하고는 뚜껑을 덜 닫았나 보다. 장아찌 통이 바닥에 철퍼덕되면서 고추는 여기저기 흩어지고 주방과 다용도실 바닥에는 국물이 흥건해졌다. 사고를 제대로 쳤다. 국물은 어디까지 튀었는지도 모르겠고 우선은 아일랜드 밑으로 들어간 국물부터 해결을 해야겠다. 아일랜드가 이동식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아일랜드를 밀고 보니 바닥에 쌓여있던 먼지가 보인다. 정신이 멍해졌다.
'청소를 어디서부터 해야 하지?'
국물과 먼지가 뒤엉키지 않게 청소기로 먼지부터 청소했다. 그러곤 바닥에 널브러진 고추들을 주워 담고 장아찌 국물을 닦으려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다. 젠장...... 어쩔 수 없이 수건 하나를 희생시켜야겠다. 아일랜드 문과 상판에 튄 국물도 닦고 다용도실 바닥에 흐른 국물은 물청소를 했다.
이러려고 장아찌를 엎었나 보다.
원래 하려던 다용도실 정리는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이니 언제든 할 청소였다. 평소엔 신경도 안 쓰던 아일랜드 밑바닥 청소를 하고, 다용도실 바닥 물청소를 하려고 이 참사가 일어났다보다. 이럴 때 쓰라고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나 보다.
그렇지, 사는 게 그런 거지.
당장에는 고난인가 싶고, 어려움인가 싶지만 결국에는 좋은 곳에 이르게 하는 것이 예상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인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