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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향 Aug 18. 2023

빗속의 사람

비구름 너머에는

스트레스 심리 검사 중 '빗속의 사람'*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의 설명에 의하면 '빗속의 사람 그림검사는 인물화 검사에 비 내리는 상황을 첨가한 것으로서 스트레스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미술심리검사'라고 설명한다.  스트레스를 어떻게 지각하고 느끼는지, 스트레스에 대한 표현은 얼마만큼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그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식이나 심리적 자원은 얼마만큼 가지고 있는지 등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빗속에 있는 사람을 그려주세요'라는 지시문을 가지고 본인이 생각하는 그림을 그리면 그림 속에 있는 환경, 분위기, 사용하는 색채, 사람의 모습 등을 통해서 스트레스 상황과 그것에 얼마만큼 대처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비를 긴 선으로 그렸을 때 빗줄기는 더 세차고 강력한 것이 되어 이 것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자신이 겪는 스트레스를 더 강조한다고 말하고 있다. 점선이거나 방울로 비가 묘사가 있다면 스트레스는 상대적으로 약한 수준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내리는 비를 막아줄 우산과 같은 보호장비들은 있는지 또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를 가지고 스트레스에 얼마나 대처를 하고 있는지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내가 그렸던 그림을 예를 든다면,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 정도였고 적당한 햇빛이 있는 상태였다. 우산이나 우비 등의 보호장비들은 없었지만 비를 맞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제 해가 나는구나.' 하는 마음에 빗물이 살에 닿는 게 오히려 기분이 살짝 좋았던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그 그림에 대한 해석을 소소한 스트레스 상황이 있긴 하지만 그 스트레스를 적당히 즐기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또 어떤 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내 몸에 빗방울 하나 닿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로 우산과 우비, 장화로 중무장한 사람을 그렸던 적이 있다. 온갖 스트레스가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 상황을 나름 잘 준비하여 대처하고 있는 정도로 해석을 들었던 것 같다.


상담을 하고 있는 지인을 통해 이 검사를 받아보고는 틈틈이 내 상태를 살펴볼 때가 있었다. 종이 위에  그리지는 않더라도 지금의 내가 '빗속의 사람'을 그린다면 생각하고선 머릿속으로만 그림을 그려본다. 어떤 날은 비가 거의 다 그치고 떠오르는 햇빛에 물이 반짝반짝 거리는 날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비가 올랑말랑 하며 흐린 날이기도 했다. 비가 와도 기분은 썩 괜찮은 날이 있었고, 흐리기만 해도 기분이 어두운 날도 있었던 것 같다.




엄마를 보내고 2개월, 엄마의 부재를 한가득 체감한 여름휴가를 보내고는 마음이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겐 날을 세우고 있었다. 지하 깊숙이 내려간 기분의 무거움을 가지고 동굴로 슬금슬금 들어가던 참이었다. 괜히 호르몬 탓을 해보지만 이 상태의 내가 누구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참을 잊고 있었던 '빗속의 사람'이 생각났다. 오랜만에 그려본 그림은 까만색으로 뒤덮인 어둠만이 가득한 그림이었다. 그 어둠 속에 비는 오고 있는지 사람이 있기나 한 건지 아무것도 보이지기 않았다.


'지금 내 상태가 이렇게 새까맣구나.'


그림 하나로 모든 걸 얘기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나의 상태가 인지가 되었다. 마치 옷가게에 있는 거울로 길쭉길쭉한 모습의 나를 보다가 집에 있는 거울 속에 비친 정직한 몸의 나를 보는 기분이었다. 처음 마주하는 색깔의 그림에 잠깐의 당황스러움이 있었지만 오히려 나를 제대로 마주하고 있는 거 같아 안도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지인 2명과 계획해 두었던 일본여행 일정이 다가왔다. 어떤 결정도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무의지 상태에, 비행기에서 미세한 공황증상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살짝 걱정이 올라왔고, 가기 전 아버지식사를 이것저것 챙겨놓고 가야 하는 것도 부담이 되는 상태였다. 태풍이 와서 여행이 취소가 되어도 아쉽지 않을 감정 상태였다. 가고 싶었지만 귀찮았고, 귀찮았지만 또 가고 싶은 여행이었다. 출국날 아침이 밝았고 비행기에 몸은 실렸다.


비행기에서 멀미가 살짝 오는 듯했지만 생각보다 힘들지 않게 40분의 비행을 잘 마쳤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 덕분일까 일본에 도착하니 몸이 1초 정도 붕 뜬 거 마냥 기분이 좋아졌다(최근엔 감정이 미친 X 널 뛰듯이 자주 제멋대로다). 컨디션은 생각보다 괜찮았고 여행은 적당히를 넘어서서 딱 하루만 더 놀다가 가고 싶을 만큼 즐겼다. 아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 상태는 여전했기에 여행 내내 졸졸졸 따라다니기만 했다. 길 눈이 밝은 내가 왔던 길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길치가 됐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말이다. 음식 메뉴를 정하고 애정하는 브랜드의 운동화를 살 때 말고는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를 유지했다. 말 그대로 정신을 놔버렸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에 의해 우리 3명 중에 또라이는 나라는 것을 자청하면서 말이다. 15년 이상 나를 봐온 내 지인들은 그런 나를 그러려니 하며 적당히 놀리면서 늘 그렇듯 그 시간을 함께 해주었다.  




3박 4일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빗속의 사람'을 다시 그려봤다.  틈 없이 새까맣던 하늘에 조금씩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암막커튼 같았던 천이 미세한 구멍이 있는 린넨소재의 커튼으로 바뀌어 가는 느낌이다. 그 아주 작은 틈으로 미세한 빛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는 것 같다. 여전히 하늘 가득 먹구름이 있지만 그 너머에 햇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물을 잔뜩 머금은 구름이 또 어느 순간 한가득 비를 쏟아내기도 하겠지만 그건 또 그대로 필요한 순간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구름 너머에 햇빛은 비치고 있고 비구름은 언젠가는 지나갈 테니 말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 빗속의 사람 그림 검사 [Draw-a-Person-in-the-Rain] (심리검사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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