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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향 Apr 11. 2022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그러나 하고 싶은 이야기

쓰고 싶었지만 쓰기 싫었던,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쓰겠지 생각한 주제의 글을 쓰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얼렁뚱땅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박완서 작가님의 글을 마주하지 않았다면 굳이 내 속에서 끄집어내지 않았을 이야기이다. 단단하게 자리를 잡은 나무가 뿌리째 뽑힐 정도의 거센 태풍이 불어 닥치는 것, 그것이 삶에 마주한 죽음이라는 이미지이다. 그렇기에 굳이 내 손과 입에 올리지 싶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한 번은 대면을 해야 할 것 같았고 멍석이 깔린 것만 같아 그 핑계로 오랫동안 묵혀두고 또 새롭게 담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너 염세적이구나.’ 20대 초반 선배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아마도 ‘난 그렇게 오래 살고 싶지 않아요.’라는 나의 말에 보인 선배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낙천적이고 긍정적이었으면 좋겠다 싶지만 그렇지 않음 또한 나의 모습이니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고 있다. 선배에게 그런 말을 들었던 때, 2000년대 초반의 평균수명이 76세였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평균수명이 83세로 늘어났고 많은 사람들은 평균수명만큼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살기를 바라고 있다. 늘 평균치의 삶을 지향은 하지만 수명만큼은 평균을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전, 결혼, 가정에 대해 두둥실 떠다닐 수 있을 정도의 꿈을 꾸었던 그 시절에도 수명에 대한 내 바람은 그랬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그 생각은 여전히 동일하다.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건강하게 짧고 굵게 사는 것이 목표이다. 그런 생각을 언제부터 왜 가지게 된 것인지, 나도 알지 못하는 삶의 어떤 기억이 나를 그렇게 이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죽음에 대해서 명확히 인지하게 된 것은 내 나이 31살, 할머니의 장례식이었다. 친할아버지는 5살 때 돌아가셔서 남아있는 기억이 거의 없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이민 생활 중에 돌아가셔서 현실감이 없이 지나갔다. 친할머니는 치매로 요양원에 계셨던 4,5년을 제외하고는 오랜 세월 같이 살았다. 그래서일까, 이렇게까지 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장례식에서 너무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위로예배를 드리면서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찬양을 부르기라고 하면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거 마냥 눈물이 흘렀고, 곱고 고운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보고 있으면 또 그랬다. 입관식에 들어가 곱게 화장을 하고 고운 옷을 입은 할머니를 보니 할머니한테 못되게 군것만 왜 그렇게 생각이 나는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을 하다 겨우겨우 울음을 멈추고 나왔다. 당시 아버지는 직장생활 때문에 해외에 계셨고, 할머니의 소천 소식을 들으시고는 부랴부랴 한국으로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자식들 중에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 서셨다. 다른 가족들은 적막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인사를 하시던 아버지가 덜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시더니 이내 어깨에서 작음 떨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다가가 위로를 할 수 없는 순간이었고 우리는 슬픔을 함께 가졌다. 아버지가 그렇게 우시는 것은 처음 봤다. 아버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들썩이는 뒷모습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모의 죽음이라는 것이 자식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아주 조금 알 것 같았다.


업무의 특성상 많은 장례 소식을 듣게 된다. 환절기에는 한주에 많게는 4건의 장례가 생길 때도 있고, 평균적으로 한주에 한 번은 장례 소식을 듣게 된다. 연세가 드셔서, 투병 중에, 사고로 급작스럽게, 떠나시게 되는 이유는 다양하다. 100세가 다 되신 어르신부터 6살짜리 꼬마 아이의 장례까지 연령도 다양하다. 많았던 장례식 중에는 자식을 먼저 앞세운 장례식도 몇 번 있었다. 16년 전, 고속도로 빙판길 교통사고로 나의 선배이자 친언니의 친구가 28살의 나이로 하늘로 갔다. 이제 막 가정을 이뤘고, 아내의 뱃속에는 아기가 있었다. 선배의 아버지는 신원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몸이 다 부서진 아들의 시신을 확인해야 했고 어머니는 충격이 클까 봐 그마저도 보지 못하셨다. 두 분은 그렇게 아들의 장례의 치러야 했다. 지금도 그 부모님을 볼 때면 이따금씩 선배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 한쪽이 욱신하다. 그리고 작년 10월, 결혼한 지 1년이 겨우 넘은 32살 된 후배의 장례식을 다녀왔다. 유방에서 시작된 암은 젊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독이 될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전이가 되었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그렇게 1년 정도의 투병생활을 끝에 후배는 부모님과 남편의 배웅 가운데 하늘나라로 갔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서 안내판에 나오는 후배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J가 이제는 없는 건가? 진짜 간 건가? 몇 주 전만 해도 교회에서 마주쳤는데 왜 J사진이 저기에 있는 거지? 이거 현실인가?...... 진짜구나, 진짜 갔구나.’ 한동안은 장례식장에서 봤던 앳되고 예쁜 J의 사진이 계속 떠올랐다. 어쩌면 J의 모습을 잊고 싶지 않아서 계속해서 되새기고 되새겼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기도를 했다. ‘J 이제 안 아프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동안 너무 힘들었는데 이제는 힘들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누군가의 죽음을 두고 그런 기도를 했던 것은 처음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반드시 한 번은 경험해야 할 순간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거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일, 또 누군가는 나의 죽음을 지켜봐야 순간이 분명 온다. 얼마 전 종영한 '서른, 아홉'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마흔을 코앞에 둔 세 친구의 우정과 사랑,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다루는 현실 휴먼 로맨스 드라마'라고 소개가 되어있다. 3명의 절친 중 한 명이 췌장암 말기 진단과 함께 생존율이 1%라는 벼락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치료가 가능한 초기도 아닌 말기암이라니. 만약 나라면,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주변 정리를 하시라는 말을 내가 듣게 된다면 어떨까? 아픔 가운데 죽어가는 그 과정은 싫고 겁이 나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내일의 삶이 보장되었다고 믿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없기에 내가 죽는 것에는 (당장에는) 큰 두려움이 없다. 하지만 타인의 죽음, 그리고 죽음을 누군가의 부재로 생각한다면 적잖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재작년 공황 증상을 겪은 이후로 그 두려움과 불안이 더 커진 것 같다. 매 순간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되면 유리구슬 만하던 두려움이 순식간에 농구공이 되어 나에게 날아온다.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생각해봤다. 결국 누군가의 부재 이후 남게 되는 내가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항암치료 중인 어머니가 컨디션이 많이 떨어지거나 검사 수치가 좋지 않게 나오면 자연스러운 불안감이 생긴다. 편찮으시고 상태가 악화될 경우 어머니가 겪게 될 고통에 대한 걱정보다는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나를 더 걱정하는 내가 보였다. ‘엄마가 없으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난 어떻게 살지?’ 누군가의 부재로 인해 내가 마주하게 될 감정과 상황들이 나는 겁이 났던 것이다.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나 싶을 정도의 솔직한 마음이다.


2022년을 시작하면서 한해의 다짐과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유연함을 가지고, 놓아야 할 것과 붙잡아야 할 것을 잘 구분할 수 있기를’ 이런 결심을 해서인지 배우게 되는 상황들이 꾸준히 생기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상황들을 구분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고 연습(실습) 중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자꾸 내 힘을 태풍을 막아보려 하는 거 같다.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나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나중에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나의 죽음 앞에서 후회 없을 정도로만 살고 싶다. 태풍은 못 막더라도 몸을 피할 수 있는 집 정도는 지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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