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잠들며 또 집에 있지 말고, 오늘은 꼭 혼자 어디로든 나가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빛은 우울하고 비까지 내린다. 하물며 허리까지 아프다. 늘 그랬는데 뭘, 그냥 집에서 집안일이나 하고 있을까. 어제 한 약속은 지켜야 하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테지만, 제일 두려운 건 그게 나와한 약속이라는 거다. 그래. 나가자! 오늘까지 집에 있으면 더 우울해질 것 같다. 의지를 보여주는 진통제를 한 알 먹고, 아이들 식사를 챙기고 무작정 집을 나왔다. 집을 나설 때는 도서관을 갈지 카페를 갈지 결정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평소에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산청 지리산도서관'을 네비로 검색하고 출발했다.
목적지를 정하고, 지나간 팝송을 들으며 비 내리는 길을 운전한다. 평소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오늘은 어쩐지 내가 드라이브를 좋아했던 것 같은 기분이다. 왠지 진짜 어른, 자유인이 된 기분이다. 내 의지가 내 의지를 이겼기 때문일까. 방학 동안 가족들 밥 차려주고 아이들 스케줄 챙기느라 사라졌던 '내'가 다시 선명해지는 것 같다.
집에 있으면 특히 방학 때, 가족들에게 끝없이 소환된다. 무얼 하든 가족들은 서로 레이더망에 잡히고 서로를 간섭한다. 이렇게 사람에 지칠 때면 도서관이 좋다. 도서관은 서로에게 무관심해야 하는 공간이니까. 가족끼리 간다고 해도 서로 대화를 오래 나누어선 안된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의 세계에 몰입한다. 도서관에서는 비로소 나만 존재하는 기분이다. 특히 책에 몰입하면 더 그런 느낌이 강해진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이 나에게 늘 에너지를 준다. 뭔가 오늘 하루도 열심히, 알차게 살았다는 안심과 함께.
산청 지리산도서관은 이름만 들으면 지리산 깊은 곳에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리산과는 조금 떨어진 산청군의 아래쪽인 신안면 원지에 위치하고 있다. 도서관 바로 옆에는 경호강과 만나는 양천이 흐르고 있어 산책하기에 좋다. 둑 아래에 주차할 수 있는 곳이 많아 캠핑카도 많이 온다고 지역주민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드문드문 캠핑카가 보이기도 한다. 하천을 따라 둘레길이 있어서 날씨가 좋은 주말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산청 지리산 도서관 앞 양천
지리산도서관의 입구부터 내부 곳곳에, 화장실까지 귀여운 곰이 그려져 있다. 지리산도서관을 상징하는 지혜로운 곰, '곰지'라고 한다. 지리산에 사는 반달가슴곰을 떠올리게 한다. 캐릭터를 활용한 도서관은 그전에 본 적이 없는데, 신선하게 느껴진다. 아이들은 물론일 테고 어른인 나도 친근하게 귀엽게 느껴졌다.
지리산도서관은 개관한 지가 5년도 되지 않아 책이 대부분 낡지 않았다. 인테리어 또한 최신 트렌드에 맞게 밝고 화사했다. 또한 서가가 거의 다 곡선으로 되어있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서가를 따라 걷는 것이 마치 미로 찾기처럼 즐겁다. 1층이 거의 다인 작은 도서관이었지만 무척 아늑하다. 책을 절로 읽고 싶은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다녔던 도서관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것 같다.
2층에는 작은 열람실이 있고 강연을 하는 공간과 사무실, 외부 테라스가 있다. 거의 1층이 도서관의 전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1층은 한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한쪽은 어른 책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어린이 책이 있다. 어린이 자료실의 책상과 의자도 카페처럼 좋아 보였는데 아이들이 대부분 앉아있어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그 좋은 공간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책 대신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도서관에 온 이유가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온 것일까, 아니면 와이파이가 있어서 도서관에 온 것일까? 아니다! 아이들은 책을 읽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휴대폰을 보는 것일 거다. 아니면 전자책을 읽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좋은 공간에서 아이들은 책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믿는다.)
평일 방문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아 창가 자리가 비어있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고 바깥을 볼 수 있는 창가 자리는 늘 어디서든 좋다. 처음에 앉았을 때는 의자가 다소 불편했지만 익숙해지니 불편함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책을 보다 문득 창문 밖을 보면 비 내리는 풍경이 있다. 편안해지고 따뜻해지는 공간과 풍경이다. 하루 종일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배만 안 고프면.
오늘 도서관에서 읽은 책은 신간 코너에서 발견한 박완서 에세이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이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몰입해서 읽고 있으니 박완서 선생님이 옆에서 조근조근 속삭이듯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느낌이다. 자식을 키우는 엄마로서의 일상과 작가로서의 일상이 많아 생생하게 느껴졌고 공감이 되었다.
지금 내 마음을 들킨 듯, 인상적인 구절이 읽었다.
"자주 여행을 다니는 것도 내 집에 돌아올 때의 감격을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집은 편안한 만큼 헌 옷처럼 시들하기가 십상인데 그 헌 옷을 새 옷으로 만드는 데는 여행이 그만이다. 그러나 때로는 집도 낯설고 불편할 때가 있다. (중략) 집에 붙어 있음으로 생기는 온갖 인간관계까지가 헛되고 헛되어 견딜 수가 없을 때 표표히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는 사람은 복되다. 나에게 부산에 있는 베네딕도 수녀원은 고향과 같은 곳이다."
어쩌면 나에게 도서관은 이런 고향집 같은 곳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집이라는 공간이 조금은 지쳐서 온 것이니까. 이럴 때 마음 편하게 올 수 있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사진을 찍고 보니 산청지리산도서관은 생긴 모양도 참, 푸근한 고향 집 같다.
<산청 지리산도서관>
-주소: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원지강변로 101 (055-974-1611)
-휴관일: 매주 월요일, 공휴일(월요일마다 휴관이니 요일을 꼭 확인해야 함.)
-운영시간: 1층 자료존(어린이, 일반) 09:00~18:00 / 2층 지리산 북카페 09:00~21:00
-대출 권수 및 기간: 1인 10권(대출 가능 권수가 많다. 과월호 잡지도 2권 대출 가능)
-독서문화행사가 다양함. 유명한 작가들의 강연이 달마다 있으니 홈페이지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