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무슨 흔적을 남기는가
아침 출근길에 동생이 메신저를 보냈다.
아파트 앞 횡단보도에 고양이가 로드킬을 당했다고 한다.
시신을 정리해 줄 수원시 부서에 접수를 했다고 했다.
출근하는 동안 그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내 생활로 돌아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일이라는 듯 다시 내 삶에 집중해 버린다.
퇴근길 집에 가까워지자 다시 그 죽음이 떠오른다. 시신이 있다던 도로 쪽을 쳐다보지 않고 싶지만, 최소한의 양심으로 그 죽음이 헛된 것 같아서 그쪽을 바라본다.
시신은 이미 정리되어 있다. 시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안타까움과 동시에 그 모습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도로에 진한 색으로 물든 점박이들이 보인다. 그 점박이들 중 하나가 죽음의 증거겠지.
하지만 보지 않으면, 알지 못하면 깨달을 수 없다. 도로의 수많은 점박이들이 죽음의 표시인지 단순하게 비가 내린 후 물기가 머물러 있는 웅덩이인지 말이다.
또 다른 출근길 너무나 밝아서 모든 것이 다 깨끗하게 잘 보이는 날이다.
남대문 앞에는 비둘기들이 많이 살고 있다.
횡단보도에 무언가 진한 색 물체가 있다. 형체는 알아볼 수 없다.
짓이겨져 있는 어떤 형체. 그것이 한때는 생명이 있던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그 위로 사람들이 걸어가고 차바퀴가 지나간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존재는 사라지고 잊혀져 간다.
조금 두꺼운 점박이로 시작해서 시간이 지나며 마모되고 흐려져 평평한 점박이로 남겠지.
그 존재에 대한 애도에 눈물이 맺힌다.
집 근처 공원에서 어린이를 위한 물놀이 공원을 만든다.
공원의 일부가 되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던 나무들이 있다.
물놀이장을 만들기 위해 나무가 있던 그 자리가 필요하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물놀이장인가 나무인가.
생각할 시간도 없이 나무는 뽑힌다.
뽑힌 나무는 어디로 가는가. 다른 곳에 다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누군가 그 나무의 자리를 찾아줄까.
아니면 베어지고 슬라이스 되어 우리 회사의 프린터기 안에 A4 형태로 다시 나를 찾아올까.
뿌리가 있던 땅 아래에 큰 구덩이가 남았다. 그 구덩이를 철물구조와 콘크리트가 차지했다.
흙이 다시 덮이고 물놀이장이 개장된다. 물놀이장은 성공적이다.
하지만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그 구덩이 위는 항상 물이 고인다. 물이 빠지지 않는다. 나무가 하던 업무를 철물과 콘크리트는 해내지 못한다.
나는 왜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할까.
무한한 이기심에 끝도 없는 자기중심적인 마음에 좋은 것은 보고 싶지만 나쁜 것은 절대 싫다는 그런 마음가짐.
그 마음가짐을 깨닫고 고개가 숙여진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살고 싶다던 그 마음에 다시금 금이 가기 시작한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차별 없이 그렇게 대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