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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비를 맞고 싶었어

나의 잘못된 노력

by 구름파도


사랑을 원하는 지금까지의 나에게

나를 사랑해주는 여러분께

이 글이 비가 되기를.


#0


브런치북을 두번이나 파토낸 이후, 바로 직전에 반성하는 글을 썼었다. 읽는 분들께 죄송하다고 빌며, 이번 브런치북은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테니 한번만 용서해주시길 바란다는 마음을 담아 쓴 글이었다. 글을 올린 뒤 정말로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떠나지 않고 기회를 주셨다. 이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부디 지켜봐주세요!!)


거두절미하고, 사실상 이 브런치북의 처음이 될 이 글. 첫 문장을 쓰는데도 많은 시간을 쏟을 만큼 고민을 거듭하였다. 지금 읽고 계신 글이 브런치북의 얼굴이 될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써야 맛집이라고 소문이 날까...하고 신중, 또 신중을 기했다.


글을 그릴 도화지가 될 글의 주제를 떠올려보니 그다지 밝지 않은 이야기만 주구장창 떠올렸다. 밝은 것보단 어두운 것을 생각하는 나의 성격 때문일까.나의 근원이 되는 내용을 쓰고 싶었다. 나의 가족, 나의 글 쓰는 방식, 나의 원죄 등. 다양한 주제를 떠올려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의 근원이라고 할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내가 브런치북을 두 번이나 파토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나의 인정욕구, 사랑받고 싶은 마음.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자 의지가 사라져버린 나의 행보에 대해 쓰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내가 글을 쓰는 원동력이기도 하고, 내 사랑에 대한 욕구의 역사는 길기 때문에. 내가 사랑받기 위해 했던 노력들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그러므로 이 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오늘의 글은 긴 시간동안 사랑의 비를 갈구했던, 갈라진 내 마음을 적시려 했던 나의 노력에 대한 이야기다.


#1


누구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그게 살아있는 것이든 살아있지 않은 것이든 말이다. 이 말은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재산이니까. 다만 이 말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주고 받는 사랑의 크기도 균등할까? 사랑을 받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이미 과분할 정도로 가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나에게 사랑을 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 것은 가족이었다. 태초에 받았던 사랑은 그들에게서 받은거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크기가 같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 것도 가족이었다. 부모님께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내게 하시는 말씀이 있다. '네가 둘째라서 관심을 덜 쏟게 돼' 부모님께서는 가볍게 하신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 얼마나 나를 상처받게 했는지!


관심을 덜 쏟으신다는 사실이 편하게 작용할 때도 있었다. 시험 성적표를 받았을 때, 내 형제들에게 좋은 일(상장을 탔을 때 같은 상황)이 생겼을 때라던가 말이다. 나한테 기대를 품지 않으시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 편하게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비교가 덜하다는 말이다.(이 점 때문에 나는 고3이 되기 전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말 편했다. 다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만 빼면 말이다.


부모님의 관심을 부담스럽게 여기시는 분은 내가 무슨 멍멍이 소리를 하느냐고 말씀하실 수도 있다. 사람은 원래 받을 수 없는 것을 갈구하는 법이다. 금쪽 같은 첫째와 막내 사이에 껴서 공기처럼 지내보면 관심에 목이 마를 것이다. 내 마음은 항상 매말라있었고,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한 사랑의 비를 갈구했었다. '니가 그럼 그렇지'라든가 '둘째니까'같은 말이 아닌 '장하다'라는 말 한 마디가 너무 듣고 싶었다. 내 노력이 사랑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 큰 어른인 나는 그러려니 하지만, 아직 어렸던 지난 날의 나는 그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이란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2


사랑받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는가. 아직도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이다. 어린시절의 나는 만화영화에서 그 답을 찾았었다. 답은 기억에 남을 칭호가 있으면 된다. 영웅, 왕, 선함 등 사랑받는 등장인물들은 그들을 가리키는 수식어, 즉 칭호가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인정받을 만한 칭호가 있으면 된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칭호는 무엇인가. 아버지, 어머니의 둘째딸, 언니의 부하, 동생의 보모,(이는 어릴 때 언니에게 자주 부려먹혔고,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을 돌보는게 나였기 때문이다.) 유치원의 울보 등. 지금의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래서 지금까지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변화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선택한 길은 '착한 아이'가 되는 길이었다.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 '선'을 행하는 주인공처럼 착해지면 모두가 나를 사랑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나는 가족에게서, 친구에게서, 타인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를 변화시켰다.


착해지기 위해 가장 빠른 길을 택했다. 이전의 나를 죽이면 되는 것이다. 마음속에 쌓아온 불만, 분노와 같은 감정들, 솔직한 생각, 타인이 나쁘다고 규정하는 행동들. 그 모든 것을 억제한다. 불만이 있으면 말하지 않는다. 화가나도 참는다. 슬퍼도 울지 않는다. 무조건 타인의 생각을 긍정한다. 내 생각은 죽인다. 행동을 타인에게 맞춘다. 이것이 내가 착해지기 위해 행한 방식들이며, 이렇게 하면 모두가 나를 사랑해주었다.


모두가 나를 착하다고 띄워주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나를 자랑스러워했고 언니와 동생은 내숭 떤다고 할지언정 싫어하지는 않았으며, 친구들은 나를 좋게 봐주었다. 내가 받고 싶었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정말로 기뻤다. 가족들이, 친구들이, 타인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내가 착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버리지 않았으며 나를 죽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20년이 지났다.

내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돌이킬 수 없었다. 나를 죽인 끝에 진짜 나를 보여줄 수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3


내가 나를 보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가장 먼저 깨닫게 해주신 것은 부모님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나를 자랑스러워 하셨다. 내가 착한 아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렇게도 좋으셨나보다. 부모님께도 아이를 잘 키웠다는 훈장이 따라왔으니까. 친인척들이나 지인들은 나를 착한 아이라고 기억했고 가족들도 나를 그렇게 소개했다. 나는 그렇게 불리는게 기분이 좋았다. 그 말들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여 내 마음속에 비를 내릴 수 있었다. 그 사랑의 비. 아. 아둔했던 나는 그 비가 무엇도 자라게할 수 없음을 깨닫지 못했다.


착한 아이가 되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선해지는 것이 아닌, 오로지 타인에게 인정 받기 위해 나를 죽이는 것은 결코 착한 것이 아니었다. 죽이고 죽인 끝에 뒤를 돌아보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음을, 누구에게도 진짜를 보여줄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결국 '착한 아이'라는 가면을 벗을 수는 없었다.


나는 부모님의 착한 딸, 언니의 착한 부하, 동생의 착한 보모로서 성실하게 맡은 일을 수행해왔다. 적어도 몇년 동안은 그 행위가 만족감을 주었다. 나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게 해줬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참을성이 서서히 바닥나기 시작했는지, 얼마 안되서 깊은 권태감에 빠지게 되었다. 나의 배려가 어느순간부터 당연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착한 아이' 가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내 머리가 조금 더 자랐을 때였다. 그 당시, 언니가 여느때와 같이 허드렛일을 나에게 떠넘겼었건 날. 평소 같았으면 묵묵히 수행하였겠지만, 언제까지고 언니의 착한 부하 역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언니에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알아서 해라'라고 일갈했다. 그렇게 싸움을 붙여버렸다.


"아! 내가 왜 해야 하는데! 언니 부하도 아니고!"


"야! 얘가 갑자기 왜 소리질러! 진짜 이중적인 x! 지금 아빠가 다 듣고 있을걸!"(싸운 곳은 거실이였고 그곳에서 아버지가 주무시고 계셨다.)


"흥! 아빠 주무시고 계셔서 못 들으시거든?"


이런 내용으로 싸웠던 것이 기억난다. 잠깐의 말다툼 이후 씩씩대며 방 안에서 핸드폰을 하던 나는 생각했다. 어느순간부터 내 선의가 의무가 되버린 것 같다고. 어디까지나 내 도덕적 우월감을 채우기 위해 착함을 꾸만 것 뿐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선행이 아닌 건 아니잖아? 내 배려가 어느순간부터 그들에게 의무가 되어버렸다. 내가 받고 있다고 믿는 사랑이 사랑 같지 않았다. 애초에 받은 적도 없을지도 모르지.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즈음이었다.


몇시간 뒤, 아버지가 깨어나셨다. 그리고 얼마 안가 나를 부르셨다. 그날 정말 거하게 혼났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나보고 소름 돋는다며, 앞에서는 착한 척 하면서 뒤에서는 그렇게 언니한테 대들었냐고 하셨다. 아마 언니랑 내가 싸울 때 깨어있으셨나 보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지만 당시에는 상처를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많이 울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아버지한테 착한 아이가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지켜온 가면이 깨져버렸다.


하지만 아버지. 나는 줄곳 참아왔어요. 주변에서 나에게 '의무'를 기대하는 것도, 화가 나는 것도, 울고 싶은 것도 참았어요. 모든 것은 당신들이 나에게 기대를 품었으면 해서. 내가 자랑거리가 되었으면 해서. 같은 사랑을 주었으면 해서. 나는 화내면 안되나요? 착한 아이가 아닌 건가요?


다음날 아침, 아버지가 어머니와 대화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애가 착한 줄 알았는데, 그렇게 이중적인 줄 몰랐어. ○○한테 대들줄이야. 우리가 어쩌면 애를 잘못키운걸까?"


거절은 착한게 아닌걸까? 나는 소리를 지르고 언니한테 대들었으니 착한게 아니게 되었다. 아버지는 싸운 이유인 언니가 나를 부려먹으려 했다는 사실보다 내가 언니한테 딱 한번 대들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셨나보다. 내 이미지 때문이었겠지. 나는 충격을 받았다. 착하다는 이미지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부적이 아닌 족쇄였다. 내 행동, 말, 감정을 제어하는 족쇄. 하지만 나는 족쇄를 버릴 줄 몰랐다. 버리는 순간 무너져버리기에 계속 가지고 있을 수 밖에.


#3.5


나는 품고 있던 고민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나도 사람이기에. 화 나는 것. 슬픈 것. 하고 싶은 것 같은 욕구들을 풀어낼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어머니께 모든 것을 털어놓으려 했다. 착한 아이가 아닌, 구름파도로 돌아올 것이다.


어머니는 유하신 분이었다. 엄격하신 아버지와 자유분방한 우리 삼남매 사이를 이어주시던 분으로, 강한 신뢰와 유대로 묶여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품이 좋았고 언제든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안식처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를 들은 이후,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나는 착한 아이가 아니고 우리 가족과 조금 다른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다고. 어머니는 이해해주실거라고, 내가 이중적인게 아니고 나쁜건 더더욱 아니라고 말해주실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치부를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날. 나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은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불쾌한 것을 본다는 눈으로 쳐다보실 줄은 몰랐거든.


그날 이후, 나는 다시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더더욱 나를 죽여야만 했다.

아니. 그때부터 원래의 구름파도는 사라져버렸다.


#4


내 행동은 사랑 받는 행동이 아닌 멍청한 호구의 행동이라는 걸 알게된건 친구하고 생각했던 애들 덕분이었다. (모든 것은 자업자득이며 나는 남을 탓할 자격이 없다)


발단은 그랬다. 친구라고 믿었던 애가 문방구에서 사고 싶은 물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시에 모아둔 세뱃돈과 용돈 덕분에 또래 애들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 아이에게 허세를 부리며 물건을 사줬다. 아이들은 착하다, 천사라며 나를 칭찬해주었다. 나는 사랑받는 기분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그 사랑이 산성비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 시작되었다.


나에게 많은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아이들은 그날 이후 이것을 사달라, 저것을 사달라 요구하기 시작했다. 멍청했던 나는 처음에는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 하지만 점점 요구가 셀 수 없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잘라서 더이상은 안 된다고 거절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만 그렇게 거절을 하면 친구들이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기 때문에,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맹세코 그 아이들이 나를 위해 돈을 쓰는 일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착한 아이가 아닌 물주이자 호구였고, 그 아이들은 즐길 뿐. 멍청했던 나는 그 관계를 우정이라고 착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결말은 어떻게 됐냐고? 나는 결국 빈털터리가 되었고, 1년 동안 친구라고 믿었던 애들 곁에 간신히 붙어있었다.(돈이 없어지자 나를 대하는 태도가 천지차이 수준으로 바뀐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다음해에 거짓말 같이 결별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남은게 없었다. 아무것도.


나는 가족에게도, 친구라고 믿었던 애들에게도 내가 원했던 사랑은 받지 못했다. 심지어 남아있던 착한 아이 칭호마저 내 마음을 더 공허하게 만들 뿐이었다.


#5


칭호가 아닌 족쇄를 달고 산지 몇년.

나는 남은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조용히 해가 지나가는 걸 지켜볼 뿐.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태도가 변하자 그는 돌아섰다.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내 안식처가 되어주실 수는 없었다.

언니랑 동생에게는 나이를 먹고 서먹해졌다.

친구라고 믿었던 애들에게 나는 호구였을 뿐이다.


지금은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을 많이 사겼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양호하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받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풀 한포기 나지 않는 가뭄을 겪었다. 사랑의 비로 가득 채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비는 산성비였다. 마음을 썩히는 산성비! 그 무엇도 내 마음을 촉촉하게 해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람은! 사람은 그랬다!


나는 한동안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 이후 나를 적셔줄 비를 만나게 된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후였다.


#6


브런치와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였다.


조현병을 얻게되고 정신건강과 관련된 센터를 다닐적, 같은 센터를 다니는 회원분이 브런치를 통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글.

글이라.

나는 중학생 때까지 열심히 글을 썼던 기억을 떠올랐다. 책을 많이 읽고, 글을 많이 쓰고, 상도 타고. 내 영광의 시절을 글이 장식해주었는데


변덕이었다. '나도 다시 한번 글을 써봐?'라는 생각이 든 것은. 이때까지는 글이 내 인생에서 아주 소중한 존재로 자리잡을 것이란 생각 자체를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저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안식처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브런치를 시작했다.


브런치에 처음으로 글을 쓰고, 기적처럼 작가가 되고, 글을 올리고. 이 일련의 과정들이 내 마음을 어찌나 설레게 했는지! 진짜 작가가 된다는 설렘이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내 마음을 누군가에게 전파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우러나온 기대감, 그것이 내가 첫글을 올리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첫 브런치 활동 시작. 나의 한걸음이었다.


나는 첫글을 올리고 놀라움에 몸을 떨 수 밖에 없었다. 라이킷을 받았다. 그것도 30개나! 가족들, 친구들, 누구에게도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닌 나의 안식처를 찾기위한 여정을, 30명이나 되는 분들이 긍정해주신 것이다!


나는 감격했다. 내가, 내 글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긍정해주는 느낌. 나는 그 길로 하루 종일, 몇날 며칠 동안 글을 마구잡이로 써내려갔다. 아마 한 30편은 넘게 쓴 것 같다. 내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것들을 토해내고, 긍정 받기 위한 일념으로 그렇게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친구.

이들과는 다른,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받는 사랑.

나의 또다른 사랑의 비의 시작이었다.


#7


내가 받았던 깨끗한 사랑의 비.

그 비를 더럽힌 것은 다름아닌 나였다.


브런치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몇달 쯤 지나서였나. 쓰는 것이 아주 즐거웠다. 브런치북이라는 것을 알기도 전의 풋내기의 나는 즐거움과 기쁨으로 글을 써내려갔다. 브런치북을 알고난 뒤부터는 꾸준히 우상향하는 라이킷 수를 보며 행복해했다.


그러다 얼마뒤일까. 브런치북 공모전이라는 행사가 열렸다. 작가님이 쓰신 브런치북을 실제 책으로 낼 수 있는 행사였다. 거기서 나의 인정욕구가 발동했다. 나는 내 글이 책으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사랑을 주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알면서도 그 마음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그때부터 내 글에서 나를 지워버린 것 같다. 글에서도차 가면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양산되는 글을 쓴 게 언제부터일까. 나는 이전의 감정을 담은 글을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 여러분이 나에게 등을 돌리게 된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내 생각을 담은 글이 존재할지 몰라도, '나'를 담은 글이 사라져버렸다. 오로지 라이킷 수라는 수치를 보고 판단했다. 수단이 되어버린 글. 글을 쓰는게 버거워지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수순이였다.


내가 사랑받기 위해 타인에게 요구한 것. 이것들이 정말 내가 바라는 것을 이뤄주었나? 나부터가 사랑을 준 적이 없으면서 받기만을 바란 것,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도, 친구도, 글도 진정으로 사랑해본적이 없기 때문에, 수단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모두가 날 떠난걸지도 모르지. 착한 아이도, 글도 나에게는 결국 사랑을 받기 위한, 진심을 숨긴 무언가였으니까.


두 번의 브런치북을 감당하지 못해 지워버리고 나서야, 나는 내가 받은 사랑의 비를 보답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8


사랑을 원했던 지금까지의 나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되어라.


나를 사랑해준 여러분께.

부디 그 사랑이 보답받을 수 있기를.


나는 사랑의 비를 내리기로 결심했다. 오로지 나를 위한, 나를 담은 글을 써서 사랑을 준 당신에게 보답할 수 있다면. 책을 낸다는 욕심은 버리기로 했다. 나는 아직도 부족하기에. 내 글자 한 마디가 빗방울이 되어 당신의 마음을 적시기를 바란다. 그러면 나 스스로 비를 내릴 힘을 얻을 수 있을테니까.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이 브런치북은 오로지 당신에게 보여주지 못한 솔직한 나를 선물하기 위해. 그래서 쓰는 것 뿐인걸.

이 글이 비가 되어, 사랑받고 싶었던 한 소녀의 마음을 위로하기를. 당신이 나의 무지와 욕심을 용서해주길, 당신의 사랑의 비가 되기를 바란다.

사과를 드릴 뿐이니까.

사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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