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에게 희망을, 애벌레에게 가능성을
꿈틀거리고 기어 다니며 사람들에게 혐오받는 징그러운 애벌레, 그 애벌레가 아름다운 나비로 거듭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일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이 과정을 환골탈태라고 말하며 감탄한다. 그리고 자신도 나비가 되는 과정을 꿈꾼다. 하지만 과연 모두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애벌레는 자신이 나비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을까.
나는 수많은 애벌레들이 많은 동식물들처럼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는다. 그저 살기 위해 먹고, 기어 다니고, 다른 애벌레들이 하기 때문에 번데기를 만드는 삶. 오랜 시간을 기다려도 나비가 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삶. 애벌레는 그런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 나오는 애벌레들은 자신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모른 채 살아간다. 그저 높은 탑을 만들어 그곳에 올라갈 뿐인, 그것만을 삶의 가치로 사는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 꼭대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도, 아래에서 높은 곳으로 기어오르는 애벌레를 짓밟으며 꼭대기에 서있는 것이 삶의 가치인 것처럼. 그리고 그 결말이 탑에서 떨어져 죽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애벌레들은 마지막에 깨닫는다. 그저 높은 곳에 오르기만 할 뿐인 삶이 아무 가치가 없음을. 그들에게는 번데기라는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두려움의 시기를 견뎌 나비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그들은 나비가 되고, 알을 낳고, 그 알에서 애벌레가 태어난다. 생명은 그렇게 순환하고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왜 이 책의 제목은 '꽃들에게 희망을'일까? 요약한 내용만 보면 꽃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데?라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애벌레는 꽃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꽃이 온 세상에 퍼질 수 있는 것은 나비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꽃은 애벌레가 나비로 거듭날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의 잎사귀를 내주고 그들이 나비로 변할 수 있는 번데기를 만들 줄기를 제공한다. 그렇게 생겨난 나비는 꽃들의 생명의 순환을 돕는다. 애벌레의 가능성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은, 꽃들의 삶을 위한 희망이 되는 것이다.
내가 전에 쓴 글인 '집오리의 꿈'에서의 집오리도 그렇다. 집오리는 날개끝이 잘려 하늘을 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단 0.1%의 가능성을 믿고 하늘을 날아갈 날개짓을 한다. 희망을 잊지 않은 것이다. 애벌레들도 그렇다. 꽃들의 도움을 받아 나비가 될 단 0.1%밖에 안 될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믿고 새로운 희망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개짓이, 그 희망이 결코 의미없는 것이 아닌 새로운 희망을 낳겠지.
나는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애벌레들처럼 내가 나비가 될지, 아니면 기생충이 될지, 미래를 알 수 없다. 나는 남들보다 번데기를 만드는 방법을 늦게 배웠으니까. 내가 나비가 될 수 있을 지 한치앞도 모르기 때문에 번데기를 만드는게 두렵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번데기를 만들 수 있기 위해 희생하고 자리를 마련해 준 꽃에게 보답할 방법은 내가 나비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글이라는 이름의 번데기를 만들고 있다. 그저 자기 자신의 위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나와 꽃을 위한 번데기를 만들고 있다. 내가 나비가 될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될지. 다른 사람에게 꽃이라는 이름의 희망을 피워낼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젊다. 번데기가 열릴 긴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열심히 실을 뽑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