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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결국 사랑으로서 살아간다.

by 구름파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톨스토이가 남긴 유명한 소설의 제목이다.

정말로 좋아하는 소설이었는데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읽어보았다.

이 소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천사가 하나님이 던지신 세 가지 진리를 깨닫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현대사회의 풍파를 겪어온 우리들은 이 진리들에 무슨 답변을 달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의 마음에는 시기와 증오가 깔려있다. 서로 다른 이념으로 분열하고 혐오하며 매일 같이 끊이지 않는 싸움을 지속한다. 서로의 증오가 사라질 때까지, 혹은 시기하는 마음을 토해낼 때까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조건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가정환경, 경제 수준과 같은 삶의 조건들을 선택할 수 없으며, 그 조건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가 처음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조건에 의해 허락되지 않는 것을 결정한다니 우습지 않은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돈, 음식, 집, 옷, 취업, 직장, 대출금, 명예, 그 밖에 온갖 물질적이며 쾌락적인 것들. 돈이라는 전제조건이 없으면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다. 사람은 이렇듯 물질적인 조건 아래에서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있다.


19세기의 소설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세 가지 진리에 긍정적으로 답변하기에는 나는 세상의 어두운 면을 많이 봐왔다. 사랑, 믿음, 희망 그런 허무맹랑한 말들을 믿고 인간의 가치로 삼기에는 나는 각박한 현대사회에 너무 찌들어 사는 걸지도 모른다.

출처-brunch.co.kr


하지만 이 소설은 '사랑'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이 세 가지 진리에 대한 답을 내게 보여주었다.


사람에 마음에는 사랑이 있다. 시기와 혐오로 가득한 인간군상 속에서도 사랑으로 사람들을 포용하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소설 속 천사에게 구두장이의 아내 마트료나는 초라한 모습의 천사를 시기하고 혐오했지만 마음속의 있는 사랑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포용한다. 이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현대사회의 사람들과 일맥상통한다. 혐오를 사랑으로 이겨내는 사람들. 자신에게 하등 도움 될 것이 없음에도 취약한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마음속에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미래이다. 사람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으며 그게 죽음이든 주체적인 삶이든 그 어떤 것도 바라볼 수가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조건을 예측할 수 없듯이 미래 또한 예측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소설 속 허영심 많은 부자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었듯이. 미래에 곧 찾아올 죽음이라는 결말 앞에서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지, 삶에 순응하며 살아갈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경제적 요건, 신체적 요건, 사회적 요건 등 다양한 조건들이 우리에게 제약을 만들고 삶을 순탄하지 않게 만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랑은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사랑을 품고 살아간다.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속에서 사랑으로서 삶을 완성시켜 나간다. 사람은 자신의 안위와 보살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사랑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사랑이라는 허무맹랑한 가치에 긍정할 수 없을만큼 사회에 찌들었지만, 그래도 사랑이 있음을 믿고싶다. 아무리 혐오와 증오로 가득 찬 세상일지라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을지라도 사람은 사랑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시는 부모님만 보더라도 이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사랑함으로써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 1서 3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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