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버스를 타다가 버스 전면에 걸린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23년 3월 1일부터 현금없는 버스를 시행합니다’
과연 버스를 타보니 익숙한 버스카드 찍는 곳 밑 현금통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현금승객은 어떻게 하지?’
의문이 들어 두리번거리니 운전석 뒤 아크릴 유리판에 붙여진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현금으로 승차하신 고객은 아래 계좌로 입금해주세요”
다들 생각하시겠지만 이렇게하면 100% 모든 현금승객이 입금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기획을 한 사람은 바보인걸까요?
아니면 버스회사가 천사라서 무임승차를 각오하고 현금없는 버스를 시행했을까요?
제가 만약 버스회사 기획자라면 이런 식으로 가설을 세우고 검증을 했을 것 같습니다.
“현금승객의 비중을 고려했을 때, 무임승차를 각오하고서라도 현금없는 버스를 운영하는 것이 현금통 운영보다 효율적이지 않을까?”
기획자는 디테일에 강해야 합니다.
실무를 잘 알고 있으면서 관련된 제도와 법률의 지식이 있으며 상상력까지 풍부하면 더욱 좋습니다.
버스에 현금승객을 위한 현금통을 운영한다면 발생하는 업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ㅇ 일단 지폐와 동전을 관리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 들어온 지폐를 은행에 입금하고 동시에 필요한 동전을 환전해와야 합니다.
- 은행이라면 매일같이 일정산 마감을 하는데, 버스에서도 만약 한다면 관리인원이 역시 필요합니다.
ㅇ 기사님들은 첫 운행, 마지막 운행 종료 후 무거운 현금통을 들고 나르며 담당자와 정산을 하거나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ㅇ 버스를 운행하는 중에도 고객을 응대해야 합니다.
- 행선지별 요금을 물으면 알려주고 또 동전이 나오도록 눌러주는 등
만약 현금승차 고객의 비중이 1% 이하이고 이로 인한 전체 매출이 1억인데, 현금통 운영을 위한 이런저런 노무비용 - 특히, 버스운행시간이 지체되는 것 등 -이 1억을 초과한다면?
그 때는 현금통 자체를 없애는 방안을 고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해놓고 회사에서 기사님들께 현금승차 고객에게 이체하셨냐고 일일이 확인하게 하면, 그건 본말전도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고객이 실제 이체했는지를 전방주시하고 있어야 하는 운전기사님께 어떻게 확인시킬 것입니까?
그렇다고 본사로 전화해서 입금을 확인해달라고 할까요?
냈다고 배째고 가 앉으면 기사님이 운전을 멈추고 일어나서 실랑이를 벌여야 할까요?
결국 현금없는 버스는 현금승차 고객 중 상당수가 지불하지 않더라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계산과 검토 위에 시행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버스 운행속도는 단 1초라도 더 빨라질 것이고, 기사님가 사무직원의 업무부담도 일정부분 경감되어 오히려 이익인 면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획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객만”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객의 편의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고객에게 실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내부직원이 받쳐주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현장에서 돌지 않는 기획은 쓸데없는 종이낭비입니다.
좋은 기획자는 회사, 근로자, 고객 3자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교집합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회사란 가깝게는 내 상사이고, 멀게는 오너나 주주를 말합니다.
오너나 주주에게는 이익이 되더라도 기획을 실제로 이행해야 하는 근로자가 반발하고 따르지 않으면 실패할 것이고,
회사와 근로자는 아주 만족하더라도 고객을 지향하지 않는 기획은 시장에서 실패할 것이고,
근로자와 고객은 좋지만 회사에 손해가 된다면 그 기획을 실행을 하지 않을 것이므로 시작도 못할 것입니다.
이 글이 기획자로 취업을 준비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