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점호를 한 후 재빨리 기숙사로 복귀하여 어젯밤에 정성껏 꾸며 놓은 플래카드를 챙겼다. 플래카드엔 「305호 수능 대박!!!」이라는 문구가 크게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선배님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괜스레 내가 더 긴장된다. 우리는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다 같이 소운동장으로 모여 선배들을 기다렸다.
급식실과 연결되어 있는 소운동장 옆 계단에서 익숙한 모습의 선배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난 2년, 학교에 적응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던 나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J 형의 얼굴이 보였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안색은 그리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이제는 태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J 형!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수능 대박 나시고 원하는 대학 꼭 합격하세요!"
"그래 윤아, 수능 잘 보고 올게. 이따 보자!"
내가 지금 선배와 같은 상황이라면 나를 바라보고 있는 후배에게 무슨 말을 전해줬을까. 아마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겠지. 무척이나 긴장될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배들에게 잔뜩 긴장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 애써 태연한 척을 할 거야. 그리고 당당하게 말할 거야. 한 번뿐인 수능, 잘 보고 오겠노라고.
선배들은 우리가 만든 플래카드와 응원 편지에 감사함을 전하며 대형 버스에 올라왔다. 창문 너머로 의자에 앉아 있는 선배들의 모습이 보였다. 간단한 눈인사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버스는 결전지를 향해 출발했다. 우리는 시야에서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버스를 지켜보았다.
선배들이 떠난 교정은 너무나 조용했다. 쓸쓸하고 고요한 분위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그 엄숙함에 짓눌려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군가 조용히 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음은 우리 차례라는 예정된 위기감 때문이리라. 선배들을 떠나보낼 때의 그 어수선한 분위기와는 상반되는 현재의 압박감 속에서 나는 읽히지 않는 책장을 억지로 넘겼다.
자습을 감독하시는 선생님들이 바뀌어 들어오실 때마다 지금 시행하고 있는 수능에 관한 새로운 소식들을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국어 시험의 난이도는 어떠했으며 출제 경향이 어떻게 바뀌어가고 있고 다음 시험 예상 난이도는 어떻게 예측하고 있는지. 우리가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들을 실시간으로 말씀해주셨다. 세상의 모든 관심들이 지금 수능을 보고 있는 선배들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 학교만큼은 실제로 그러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수능은 빨리 끝이 났다. 저녁을 먹을 때쯤 되자 저 멀리서부터 선배들이 타고 갔었던 버스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버스에서 내린 선배들은 곧이어 우리 교실동을 향해 걸어왔다. 우리들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교실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힘찬 박수와 함께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선배들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꽉 쥔 주먹을 내어 보이거나 수험표를 흔들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최대의 이벤트인 「수능」은 수많은 환영 속에서 끝이 났다.
선배들이 돌아오자 학교는 다시 어수선해졌다. 컴퓨터실은 수능 채점을 하기 위한 선배들로 붐볐고 공중전화박스 또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겉으로 드러나진 않아도 희비가 엇갈린 말과 표정 그리고 행동들이 보였다. 웅성웅성대는 분위기 속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유지되는 엄숙한 긴장감은 이 때문인 것이리라.
원하는 만큼의 수능 성적을 거둔 선배들은 후배들이 있는 교실로 올라와 친한 동생들을 불러냈다. 야간 자습시간 중간중간 중앙 복도를 지나갈 때면 수능이 끝난 선배와 그의 후배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교실 안까지 들려왔다. 누가 잘 보고 누가 못 보았는지. 수능의 난이도와 그 긴장감은 어떠했는지. 생생한 목소리로 후배들에게 하나하나 전해주었다.
나도 J 형이 교실에 있는 나를 찾아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부디 좋은 성적을 거둬 내 앞에 찾아와 환하고 기쁜 모습으로 승전보를 알려주길 바랐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J 형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걷었으리라고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선배들과의 담화를 나누고 돌아온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J 형의 성공을 간절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