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하는 스스로 이름을 지었다.
강수하는 물로 이루어진 이름이다. 강수하는 스스로 이름을 지었다. 강수하는 어느 겨울날 기침만 해도 갈비뼈 언저리의 근육이 아려오는 북향 원룸에서 자신의 사주를 복기해보았다. 사주에 문외한인 강수하지만 음양오행이 고루 들어가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강수하의 사주에는 물이 없었다. 불, 나무, 흙, 금은 있었지만 물은 없었다. 혹자는 물이 남자가 오는 길이라고 했고 혹자는 예술적 재능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강수하의 생각은 달랐다. 강수하는 분노가 많은 사람이었다. 분노는 불과 같은 것이라 식혀야 할진대 사주에 물이 없어서 그리된 거라 믿었다. 강수하는 물이 들어가는 한자를 나열해 보았다. 물 수, 물 하, 바다 해, 강 강, 내 천...
문득 동생의 이름이 떠올랐다. 동생의 사주도 물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특히 불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작명가는 이름에 물 하 자를 넣어주었다. 하 자는 예뻤다. 왠지 밝고 생기 있게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이었다. 자매의 엄마는 그 하 자가 기생 같은 느낌이라 별로라 했다. 강수하의 진짜 이름에는 그 물 하자 자리에 바를 정 자가 들어가 있었다. 강수하는 바르고 싶지 않았다. 반짝반짝 빛나고 싶었다. 강수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어쩌면 기생이 되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늘 하 자가 들어간 이름이 마음 한켠에서 부러웠다. 그렇지만 이름을 훔치고 싶진 않았다. 그것은 어찌 됐건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
강수하는 이름이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본명은 평범했지만 나름 마음에 드는 점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중성적이었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남녀 모두에게 흔한 이름이지만 성을 붙이면 왠지 모르게 남자 쪽 느낌이기도 했다. 공장에서 근무하는 그는 중성적인 이름을 마치 카멜레온의 보호색처럼 편안하게 느꼈다. 수많은 남직원들 사이에서 이름부터 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끔찍이도 싫어하는 남색 근무복을 입을 때도 비슷한 편안함을 느꼈다. 이 보호색 같은 이름에 감사한 마음이 들다가도 혹시 이 이름이 그의 인생을 공장으로 인도한 게 아닐까 하는 끔찍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세 글자 모두 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이 발음하기 매우 어려웠다.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외국인은 아주 많이 사려 깊었던 바로 전 팀장 단 한 명뿐이었다. 너무나도 사려 깊어서 근무시간에 커피숍에서 땡땡이치다가 마주쳤을 때조차 팀원이 불편해할까 봐 자리를 비켜주던 사람이었다. 2주간 숙식을 함께했던 워크캠프 멤버들도, 수년간 같이 일을 해왔던 사람들도 아무도 제대로 그의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 이름을 말하지 못하니 될 수 있으면 부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이니셜로 그를 부르는 이도 있었지만 그것은 좀처럼 이름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딸을 낳는다면 꼭 전 세계 사람들이 발음하기 쉽도록 이름을 지어주리라 다짐했다.
그는 이름에 대한 자기만의 이론이 몇 개 있다. 이를테면 이름과 필체 간의 상관관계 같은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씨체가 그렇게 예쁘지 않았다. 그것이 복잡한 자신의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름은 획수가 너무 많아서 세 글자 모두 균형 잡히게 써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 불균형적인 필체는 이름이 아닌 다른 단어로도 이어졌다. 그는 한 번씩 친구의 정갈한 필체를 따라 해 봤다. 어려웠다. 그럴 땐 그 친구의 이름을 썼다. 훨씬 친구의 필체에 다가가기 쉬웠다. 그때부터 그는 각자의 필체는 각자의 이름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특이한 이름이 특별한 사람을 만든다고 믿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유명한 사람 중에는 특이한 이름이 많았다. 이효리나 하지원, 또는 고건이나 추미애처럼. 유명인도 그렇지만 회사의 임원들을 봐도 그랬다. 특이한 이름은 확실히 더 주목받는다. 사람들의 뇌리에 더 오래 남는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그런 삶을 끌어안고 살아온 사람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 특별함을 품어왔을 것이다. 성명학은 한자의 구성을 볼 게 아니라 이런 특별함을 봐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성명학자들은 이 특별함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아기에게만 특별한 이름을 선사해주는 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태어나자마자 특별한 인생에 대한 실격 판정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수, 하, 해, 강, 천... 사주에 물이 없다고 물을 이렇게 많이 넣어도 되나 싶었지만 강수하는 사실은 사주를 반만 믿는 사람이었다. 하, 해, 강, 수... 하, 해, 천... 그렇게 강수하는 세 글자를 골랐다. 슈퍼스타의 이름은 아니군. 하고 생각했다. 차분하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내심 마음에 들었다. 외국인이 발음하기도 쉬웠다. 그렇게 강수하는 주어진 인생 말고 스스로 만드는 인생을 살기로 했다.
<아주 독립적인 여자 강수하>
- 냉정한 분노로 나를 지키는 이야기
“강수하는 강한 사람도 아닌 주제에,
너무나 꿋꿋하다.
강수하가 너무 독립적이지 않아도 되도록,
함께 옆에 서서 가고 싶다.”
- 서늘한여름밤(《나에게 다정한 하루》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