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몇 인용 프로젝트일까
나는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전혀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고 외로움이 느껴질 때면 세상에 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라는 생각으로 그냥 느끼고 마는 편이다. 외로움도 불편하지만 사람들이랑 부대끼면서 생기는 불편보다는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꼭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진정으로 혼자되어본 적이 없어서 드는 오만인가 싶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혼자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찾아 해메이는 파워 외향인 강수하를 발견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입사 3년 차 때 혼자 호기롭게 떠났던 인도 여행길에서 크게 데고 난 후 다시는 혼자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인도는 첫 입성부터 만만치 않았다. 길은 더럽고 무섭고 복잡한데 제대로 찾아도 사기꾼 말에 속아 뒤돌아서 헛걸음을 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처음에는 델리 공항에서 노숙하며 사귄 친구들과 함께여서 괜찮았다. 그 친구들과 그렇게 무사히 기차를 타고 바라나시까지 갔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동행을 구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시간이 넉넉한 장기 여행자들인데 나는 시간을 쪼개서 온 직장인이었다. 내가 원하는 타이트한 일정에 함께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나 같은 처지의 사람을 만나도 이미 일행과 함께 예약된 차편, 숙소들이 완벽히 준비되어있어서 내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은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타지마할은 보고 가야지라는 생각으로 크리스마스날에 무리해서 아그라행 기차표를 구했다. 그리고 호기롭게 혼자 로컬들만 이용하는 작은 기차역에 갔다.
인도의 거점 기차역들은 대부분 외국인 전용 창구와 대기실을 운영한다. 그곳이 아니면 나 같은 뜨내기 인도 여행자는 티켓부스가 어디고 내 기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이 몇 번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 급하게 기차표를 구하는 바람에 바라나시 역이 아니라 근처의 작은 역에서 출발하는 티켓을 구했다. 이 역에는 외국인 전용창구가 없었다. 당연히 대중교통도 없었다. 역까지는 일주일 동안 내게 젬베를 가르쳐주었던 선생님이 오토바이로 데려다줬다. 역은 아주 작았고 사방이 풀풀 날리는 흙밭에 로컬들이 맨발로 다니거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아침식사로 길거리 노점에서 차이 한 잔과 빵 하나를 사주고선 다 잘될 거야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인도의 어디나 그렇듯 사람으로 바글바글한데 외국인은 나 혼자였다. 나는 가방끈을 부여잡고 열차시간은 다가오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플랫폼들을 가로지르는 육교 위에 멍하니 서있었다. 그때 내 나이 또래의 파사를 만났다. 그날 역에서 만난 사람 중 유일하게 영어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파사는 가족과 함께 친척집에 묵었다가 인도 북부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길이었다. 운 좋게도 내 기차는 파사네 가족과 같았다. 파사가 플랫폼 넘버를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알아냈다. 그리고 내려가서 기다리는데 무슨 방송을 듣더니 기차가 연착이라고 했다. 그래, 인도에서 연착은 흔한 일이지. 벤치에 앉아서 파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파사 부모님까지 계시니 안심이 됐다.
두세 시간쯤 지났을까. 연착된 기차에 대한 안내방송이 간간히 뭐라고 나오긴 하는데 나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파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기차가 오긴 오는 걸까. 어디쯤인 걸까. 인도의 기차역에 가면 많은 인도인들이 이불이나 매트가 담긴 큰 팩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걸 깔고 아무 데나 누워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전부다 거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들은 나와 같은 기차를 탈 사람들이었다. 모두 연착을 예상했던 걸까? 나도 눕고 싶다. 그 이해할 수 없던 문화가 조금씩 이해되려 하고 있었다. 파사가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더니 연착이 길어질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있을 거라며 함께 가자했다. 오, 나야 고마운 일이지. 파사가 없으면 기차도 못 찾을 거다. 파사의 아버지가 역 앞에서 능숙하게 인력거 2대를 잡았다. 나와 파사를 태운 인력거가 파사의 부모님을 태운 인력거를 따라갔다. 나는 막연히 쇼핑몰이나 식당을 가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력거가 점점 더 슬럼가 같은 곳으로 갔다. 나는 그제야 물었다. ‘우리 어디가?’ ‘우리 친척집에가.’
파사를 따라 들어간 집에는 대가족이 있었다. 마감도 제대로 되지 않은 합판으로 얽기섥기 짜인 책상 같은 침대 위로 안내되었다. 일곱 명쯤 되는 아이들이 처음 보는 동양인인 나를 보러 모여들었다. 내가 이렇게 바람의 딸 한비야라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과 이렇게 실종자가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교차했다. 모두들 신기한 눈으로 나를 에워싸고 구경했다. 나는 그저 파사만 꼭 붙들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뜬금없이 내 가방을 내밀며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안 그래도 내가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대도 아무도 못 찾을 텐데 여권을 내놓으라니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가방 말고 저 큰 가방 맨 밑에 있어서 꺼내기가 어려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끈질겼다. 그래, 어차피 이 사람들이 나쁜 맘먹으면 나는 수가 없겠지. 여권을 꺼내 줬다. 모두들 모여 신기하게 돌려가며 구경했다. 파사에게 여권이 있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정말 궁금해서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날 나는 거기서 낮잠도 자고 밥도 얻어먹고 그 집안의 가족사진앨범까지 전부 섭렵한 후 다시 파사 가족과 함께 기차역으로 돌아갔다. 융숭한 대접이었다. 기차역은 이미 어두웠고 플랫폼의 저 끝에서는 어떤 남자가 불을 피워놓고 주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바지를 안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 12시간 동안 혼자 있었다면 아마 나는 울면서 바라나시로 돌아갔을 것이다.
한 백인 남성의 자급자족 고군분투기가 담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마지막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이렇게 외쳤다. “이건 2인용 프로젝트라고!” 내심 나중에 혼자 시골에 내려가서 타샤 튜더 같은 삶을 영유하길 꿈꾸던 내게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뭐? 혼자선 안된다고? 그러고 보니 타샤 튜더도 처음엔 남편이 있었고 그 이후엔 자식들이 있었다. 집도 아들이 지어준 것이었다. 헬렌 니어링도 스코트 니어링이 있었다. 내가 바라나시의 로컬 기차역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기차를 타고 지금 이렇게 멀쩡히 서울에서 감회에 젖을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날 만났던 수많은 좋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확실히 인생은 1인용 프로젝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사는 데엔 진짜 친한 친구 3명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오래가는 진정한 친구란 한 명을 두기도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런 친구와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같이 하고 감상을 공유하고 삶을 포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상대방이 혹시나 나 말고 다른 이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 아닐까 하는 걱정 없이 무엇이든 자연스럽게 함께할 수 있는 그런 사이, 혹시나 한 명의 의견이 다르다면 겉치레 차리지 않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사이. 그런 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쯤부터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주 독립적인 여자 강수하>
- 냉정한 분노로 나를 지키는 이야기
“강수하는 강한 사람도 아닌 주제에,
너무나 꿋꿋하다.
강수하가 너무 독립적이지 않아도 되도록,
함께 옆에 서서 가고 싶다.”
- 서늘한여름밤(《나에게 다정한 하루》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