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순은 어려서 중매로 만난 얼굴이 까맣고 못생긴 남자와 결혼을 했다. 행색은 볼품없었지만 그래도 성실하고 똑똑해서 좋은 재목이었다. 인순의 예상대로 그는 6.25 때 학도병으로 커리어를 시작하여 장군이 되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왠지 얼굴도 점점 더 피어났다. 그가 청와대로 출근하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인순은 남편의 얼굴이 리처드 기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세월 동안 인순은 내조를 하며 세간과 집을 불리고 아들 둘을 낳아 키웠다. 그 시대에 자녀를 둘만 낳아 키운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인순은 자식들에게 결핍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누구보다 풍족하게 키워서 훌륭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의 본분이자 성공의 지표였다. 아이들이 조금 컷을 때 즈음부터는 남편도 승승장구하기 시작했으므로 두 아들을 그 누구보다도 잘 키워내겠다고 다짐했다.
남자 셋을 보필하기 위해 인순은 헌신적이었다. 언제나 남자들은 의식주에 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큰일을 해야 되는데 사소한 것에 신경 쓰게 하는 것은 안될 일이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남자들이 씻으러 들어갈 때마다 갈아입을 옷을 화장실 문 앞에 갖다 두었다. 가계가 피면서 세간을 고급지게 바꾸는 것도 인순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인순은 거기서 특히 큰 기쁨을 느꼈다. 의식주뿐 아니라 아들들 교육도 열심이었다. 광화문 한가운데의 서울 최고의 학원에 보내고 고액과외도 시켰다. 다행히 큰 아들은 머리가 좋은 편이라 인순의 기대를 곧잘 충족시키곤 했다. 인순은 큰 아들의 학력고사를 위해 절에 다니며 100일 기도를 했다. 그런데 큰 아들은 학력고사를 망치고 말았다. 인순은 자신이 이미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재수를 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몰래 의대 원서를 사 왔다. 하지만 큰 아들의 담임은 이런 수재는 기필코 서울 최고의 공대를 가야 한다며 당신 마음대로 원서를 넣어버렸다. 남자는 공대를 최고로 치고 의대는 몇 없던 조금 배운 여자 혹은 조금 공부 못하는 애들이나 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큰 아들은 합격했다. 무뚝뚝하던 남편이 말했다. “아들도 수고했지만 당신도 참 수고 많았어.”
인순은 남자를 좋아했다. 이성으로서도 그렇지만 다른 부분에 있어서도 그랬다. 예를 들어 인순은 여자 의사가 있는 병원은 가지 않았다. 여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뭔가 의뭉스러웠다. 여자가 큰일을 하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두 아들이 결혼하여 줄줄이 손녀만 낳았을 때도 손자를 원했다. 하지만 며느리들은 딸만 둘씩 낳고서는 다시 출근을 하겠다고 애들을 두고 쌩하고 집을 나가버렸다. 아들들이 사업을 벌이다 진 빚도 인순이 다 갚아줬는데, 여자들이 내조는 안 하고 무슨 바깥일을 한다는 건지. 여자가 벌어봤자 얼마나 번다고. 아들들의 밥이 걱정됐지만 너무 신경 쓰면 아들과 며느리가 싸우는 것 같아서 그만뒀다. 인순은 머리가 아파왔다. 며느리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둘째 며느리가 실수로 뒤늦게 셋째를 갖고 아들 손주를 낳아서 겨우 면은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인순의 최대 소망은 손주들의 결혼이었다. 인생이란 원래 스테이지마다 해치워야 할 과제들의 연속 같은 것일진대 이번 스테이지는 좀처럼 잘 안 되는 것이었다. 인순은 지금까진 뭐든 다 스스로 이루어왔다. 결혼도, 남편의 성공도, 부의 축적도, 그리고 아들들의 대학, 결혼, 출산까지…. 물론 인순 '스스로' 이룬 것은 단 하나도 없지만 여튼 이 모든 것들은 인순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집에만 있었지만 인순은 강 씨 집안의 마에스트로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없었다면 바깥일 밖에 모르는 강 씨 집안 남자들은 아무것도 못했을 것이다. 인순은 빈손으로 가난한 군인과 결혼하여 남부럽지 않은 강남의 귀부인이 된 성공신화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 인순의 인생에서 실패란 없었다.
그런데 손주들이 문제였다. 아들, 며느리들은 인순이 무언가 말을 하면 싫더라도 일단 따르는 척이라도 하는데 손주들은 당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특히 첫째 손녀는 성격이 드셌다. 사지 멀쩡하고 어디 가서 빠지지 않게 대학까지 보내주고 큰 회사에 취직해서 사회생활도 잘하는 것 같은데 왜 서른이 넘도록 결혼을 못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정신이 온통 다른 곳에 팔려있는 것 같았다. 기지배를 너무 가르쳐놔서 콧대만 높아진 거 아닐까. 다 결혼 잘하라고 열심히 가르쳐 놓은 건데 이것이…. 얼른 결혼시켜서 증손주들도 봐야 하는데…. 인순은 증손주들을 두 팔 가득 안아보는 상상을 했다. 그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래, 인순의 삶 정도면 이제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래서 인순은 종종 손녀에게 말하곤 했다. “할머니는 우리 수하가 언제 결혼하나 그 생각만 해.” 하지만 수하는 곰살스러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손녀였다. “제가 할머니 좋으라고 결혼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다음에는 전략을 좀 조심스럽게 바꿔봤다. “아이고, 무릎이야! 할머니 무릎이 이렇게 안 좋은데 조금만 더 지나면 우리 수하 결혼식도 못 보러 가겠네!” “제가 할머니 무릎 때문에 결혼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손녀는 끄떡없었다.
그랬던 수하가 어느 날 결혼을 하겠다고 했단다. 며느리가 와서 전해주었다. 수하가 이제야 정신을 차렸구나 싶은 마음에 기뻤다. 인순은 늘 이 순간을 상상해왔다. 이제 수하가 가니까 동생들도 알아서 뒤를 따를 것이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도록 아무도 인순을 찾지 않았다. 인순이 상상했던 손주들의 결혼은 이런 게 아니었다. 토끼 같은 손녀와 듬직한 손주 사위가 인순을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 인순은 며느리를 시켜 고급진 미제 다과를 내오며 너그러운 강 씨 집안 안주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혼수도 같이 봐주고 한복을 고를 때도 자신만의 안목으로 훈수를 두고 싶었다. 사돈 될 사람들도 어떤지 보고 평가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모두들 인순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특히 수하는 신랑감을 데리고 찾아오기는커녕 전화 한 통 없었다.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괜히 며느리에게 전화를 해 화를 냈다. “내가 걔들을 결혼식장 가서 처음 봐야겠니!” 그다음 날부터는 며느리에게 매일같이 전화를 해서 괜히 이런저런 점검을 했다. “축의금함은 꼭 따로 준비해야 한다.” “우리랑 작은 아들네 옷은 최고급으로 해줘야 한다.” “아버지 손님들 답례품을 준비해야 한다.” "예단 예물은? 폐백음식은? 이바지 준비는?" 그런데 큰 아들이 처음으로 인순에게 화를 냈다. “지금 수하 엄마도 혼주라 정신이 없는데 어머니까지 왜 이러세요!” 인순은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효자인 우리 아들이 왜 이렇게 변했을까. 역시나 며느리를 잘못 들인 모양이었다. 역시 여자들이란 예외가 없는 법이지. 어쩜 이렇게 은혜도 모를까. 강 씨 집안의 손녀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그 에미에 그 딸년이네. 인순은 역시 이래서 기지배들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다, 아직 어리지만 남자 손주가 한 명 남아있었다. 아들 손주는 인순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인순은 그 손자 놈에게 한 번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아주 독립적인 여자 강수하>
- 냉정한 분노로 나를 지키는 이야기
“강수하는 강한 사람도 아닌 주제에,
너무나 꿋꿋하다.
강수하가 너무 독립적이지 않아도 되도록,
함께 옆에 서서 가고 싶다.”
- 서늘한여름밤(《나에게 다정한 하루》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