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수원역에는 출근길 분주한 직장인들이 가득하다. 나는 덜컹대는 1호선 내 한 자리 비집고 겨우 앉는다. 열차 안 승객들은 모두 스마트폰을 보거나 잔다.
육중한 고철 소리와 함께 열차가 출발한다. 덜컹대는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포근하다. 나는 새삼 오늘은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창 밖을 바라본다.
시청역을 나오니 태평로 빌딩 숲이 울창하다. 메가시티 서울의 아침이 싱그럽게 펼쳐지는 이 순간. 바람은 스산한데 초가을 햇살은 유독 따스하다.
대학 시절 어느 외국계 회사의 인턴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남대문 상공회의소 건물에 입주한 회사였다. 당시 생애 첫 출근을 앞두고 생전 관심 없던 비즈니스 옷 가게에서 와이셔츠를 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주저 없이 얌전한 화이트를 골랐다. 학생이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보인다. '샐러리맨과 오피스 레이디.' 모두가 흰 셔츠에 검정 재킷, 검정 바지, 검정 가방까지 비슷하다.
모두가 똑같은 파란색 150번 버스를 타고 조간 무가지를 주워들고 테이크 아웃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이번 달 야근 수당을 생각한다.
난 서울의 빌딩 숲, 세련된 정글 같은 그 거대한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담배를 폴폴거리는 사람들을 부대끼며 나도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 거리를 밟을 자격이 있었다는 듯 걸어 왔었다.
몇 년이 지난 오늘 이 곳을 다시 방문했다. 컨퍼런스 장소는 남대문 상공회의소 지하 1층이었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안내 데스크에서 등록을 하고 스폰서가 제공하는 초록색 매실주스 캔을 들고 강의장에 들어갔다. 강단 뒤에는 '모바일 클라우드 트렌드와 전략'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언제부터 IT 모바일 업계의 현황이 내 삶에서 이렇게 중요해졌을까.
점심 시간엔 오랜만에 예전에 인턴으로 일했던 회사를 찾아갔다. 문 앞에서 전화를 할까 망설이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마침 칫솔을 들고 있던 B 대리님을 만났다.
"잘 지내셨죠?"
"어머, 이게 누구야?"
B 대리님은 이젠 과장이 되었다. 예전처럼 허리도 아프지 않고 곧 산후 휴가를 쓸 예정이란다. 다행이었다. 사무실에서 다른 분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한 장씩 드렸다. 이사님은 어제 또 보스턴으로 출장을 가셨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났지만 예전 내 자리에 앉아았는 인턴 외에는 모두가 그대로였다.
2.
컨퍼런스를 마치고 터벅터벅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남대문은 공사 중이고 저녁 바람은 더 스산하다. 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신호대기를 기다렸다.
대학 새내기 시절 호기심과 탄성으로 둘러보던 그때 그 남대문 시장은 여전하다. 이젠 너무나 익숙해진 갈색 구두와 셔츠 차림으로 여기저기 시장 일대를 돌아다녔다. 어느 가판대에 알록달록 폴로 양말들이 보였다.
"이거 얼마예요?"
"네 켤레에 만원"
난 한참을 구경하다 그냥 갔다.
그렇게 걷고 걸어 명동까지 다다랐다. 말년휴가 때 동기들과 군인이 아닌 척 비니를 쓰고 사진을 찍던 그 거리. 지금은 일본인보다 중국인이 더 많아졌다.
제대하면 반드시 함께 전국일주를 하자고 다짐했었는데. 서울에서 목포를 찍고 제주도를 거쳐 부산을 통해 돌아오는 코스를 계획했다. 매일 사진 찍고, 여행하고, 자유롭게 글을 쓰며 그땐 평생 그렇게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학창 시절 어울리던 친구와 선배들. 다들 이 근방 회사에 잘 다닌다고 한다. 누구 하나 잘 산다 못 산다 연락도 없이. 어느 선배 애가 몇 살이란 소식은 이젠 너무 익숙해졌다.
시청과 종로 일대의 빌딩들을 보며 나도 언젠간 이렇게 활보하겠지 하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봄이면 프리지아 한 단을 신문지로 둘둘 말아 선물하고, 어느 여름 밤 추리닝 차림으로 함께 걷던 그녀와 막연한 꿈을 그리던 그때 그 시절.
가을이면 수업을 빼먹고 단풍 구경을 갔다가, 처음으로 눈 앞에서 직접 보던 만 원짜리 연극 하나에도 설레어하던 나의 스무 살.
퇴근 길 1호선. 나는 권진원의 노래를 귀에 꽂았다.
푸른 강물 지하철 멀어지는 풍경들
소중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참 오랜만에 만났죠 학교 시절 친구들
다른 선택 다른 이야기 다른 사랑 다른 꿈
저 멀리 대교 위로 하루해가 질 때
내가 가지 않은 그 모든 길이 하나 둘 생각나
잘 걸어 온 거죠 후회하지 않아요
나의 선택 나의 이야기 나의 사랑 나의 꿈
(푸른 강물 위의 지하철, 권진원 6집)
붐비는 무리 속에 이젠 대다수의 넥타이 풀린 아저씨들만 보이고, 시커먼 전철 창문 형광등 아래 무표정한 내 모습이 비친다. 다들 귀에 뭔가를 꽂고 손에 뭔가를 들고 집에 가는 그 먼 길을 소일하나 보다.
매일 그렇게. 똑같이.
<퇴사의 추억> 단행본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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