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rasia: 의지박약
햇살이 창을 통해 길게 들어오고 있다. 빛의 각도로 봐서는 족히 오후 4시는 된 듯하다. 누가 커튼을 열어놓았을까 생각하는 동안 이마에는 핏발이 서고 뺨은 욱실거린다. 뻑뻑한 눈만 겨우 뜬 나는 아직도 침대 위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온몸은 열대야에 지쳐 쓰러진 동네의 길 잃은 개 마냥 축 늘어져 있다. 힘을 내어 움직이려 하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나질 않는다. 어쩌면 움직이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매일 눈을 뜨는 것이 이제는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져 버리기를 나는 얼마나 갈망해 왔던가?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면 차라리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2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괴테의 파우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이라도 팔아 그 티켓을 사고야 말 것이다. 그 결과가 비록 헛된 것이라도 말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온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태양빛은 어떤 잡음보다도 더 신경세포를 자극하며 불안하게 한다. 빛이 닿지 않는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다. 심호흡을 깊게 한번 한 후, 다시 감은 눈을 팔등으로 가려버린다. 순식간에 어딘가로 빠져들어 간다. 그곳은 무중력 상태이며, 적막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친근한 공기 소리가 아니라 뭉근하게 귓가를 압박하는 잔잔한 파동만이 들리는 곳이다. 나는 그 안에서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달빛이 제한적인 밤에서 느낄 수 있는 막막한 어두움이 아니라, 또는 태양의 질주를 막기 위해 드리워진 영사실의 암막 커튼처럼 인위적이지도 않은, 그저 자연현상적으로 빛이 온전히 도달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그래서 빛의 굴절을 발견할 수 있으면서도 어둠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곳. 바로 그런 심연 속을 나는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헤엄치고 있다. 주위에는 다양한 색과 무늬의 물고기들이 때로는 떼 지어, 때로는 홀로 유유히 지나간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특히 나의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서 절대 무의미하다. 더욱 마음이 안정된다. 나는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곳에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 나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서 이곳에 존재할 뿐이다.
고요에 적응이 되고 있을 즈음 옆을 지나는 물고기 한 마리가 물 바람을 일으키며 공격해 온다. 나는 중심을 잃고 뒤뚱거린다. 한 번 균형을 잃은 몸은 더 이상 자유롭게 헤엄칠 수가 없다. 볼품없이 버둥거리던 팔에 힘이 빠진다. 마비가 된 듯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더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안정과 공포의 경계선은 어디쯤인지 그토록 평안했던 마음은 점점 두려움으로 채워진다. 주위의 다른 생명체들은 하나둘씩 시야에서 사라진다. 고독하다. 얼마큼 가라앉은 걸까? 귀도 먹먹하여지고 숨도 가빠진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원하던 평화로운 심연의 모습이 아니다. 악마는 나를 어둠으로 유혹하여 그 속에 가둬버렸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발버둥 치기 시작한다. 무섭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극도의 경계심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온 힘을 다해 올라가려고 몸을 흔들어댄다. 뼈대를 감싸고 있는 하나하나의 근육들이 온통 고통을 느낀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폐에 물이 가득 차오르는 걸 느낀다. 입안에는 한 움큼 모래가 들어있다. 가뜩이나 숨쉬기가 곤란한데 모래까지 나를 괴롭힌다. 손가락을 이용해 입 안의 모래를 계속 빼낸다. 빼내고 빼 내봐도 가득하다. 아무리 덜어내고 덜어내도 모래는 그대로다. 이제는 헤엄치기를 아예 포기하고 만다. 죽는 것보다 입 안에 그득한 이 모래의 느낌이 더 버겁다. 나는 지쳐가면서도 계속해서 모래를 덜어낼 수밖에 없다. 모래는 점점 작은 돌이 되고 있다. 쇠똥구리가 똥 경단을 굴리듯 점점 크기를 크게 만들어간다. 어디 한 번 없애 보려면 없애보라지, 하고 조롱하듯 목구멍은 계속해서 이물질을 생산해낸다. 이미 내 몸은 더러운 시궁창같이 느껴진다. 이 미치도록 터질 것 같은 갑갑함을, 이 막연함의 공포를 과연 누가 공감해줄 것인가. 고독하다. 눈물이 조용히 흐른다. 그렇게 고요한 세상을 원했건만 작은 소리 하나 내지 못해 안간힘을 쓰는 나약하고 무기력한 나 자신이 안쓰럽다. 나는 세상에 그런 존재인 것이다.
영원히 사라질 것 같지 않은 입속의 흙모래를 하염없이 퍼내다 어느 순간 나는 잠에서 깬다. 실제 오랜 시간 물속을 헤엄쳤던 것처럼 사지가 피로하다. 쥐가 난 것처럼 근육이 땅긴다. 목 안도 몹시 깔깔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 쉬는 것도 고통스럽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본다. 이런 비슷한 꿈을 벌써 수년 째 꾸고 있다. 디테일은 약간씩 변하지만 깊은 물속이라든지, 물고기 떼라든지, 없어지지 않는 입안의 모래 같은 것들은 늘 똑같다. 어떤 때는 물에 퉁퉁 불은 개 사료 같은 것이 목안에 그득할 때도 있다. 나는 멍하니 앉아 벽에 걸려 있는 물고기 모양의 목각 작품을 바라본다. 입을 벌리고 있는 물고기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안하다. 도대체 이 꿈은 내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 이런 식으로 계속 가위에 눌린다면 언젠가는 호흡곤란이나 근육마비로 죽을 것만 같다. 죽음은 무섭지 않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은 정말 두렵다.
수면제가 부작용을 일으키는지도 모르겠다. 골치가 아프고 근육들은 고무줄을 당기 듯 수축작용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벌써 수년째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먹고 있다. 내 몸은 면역이 약할 대로 약해져서 이제는 조금만 낯선 음식에도 탈이 나고, 작은 먼지에도 콧물을 흘리며, 새로 산 민감성 피부용 썬 크림에도 얼굴이 뒤집어진다. 한 번은 알 수 없는 극심한 가려움증으로 침대 위에서 얼음 마사지에 선풍기만 쐬다가 1년을 훌쩍 보내버리기도 했다. 우울증은 심리적으로도 고통을 주지만 더욱 괴로운 건 모든 신체부위를 불문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시도 때도 없이 불시에, 그리고 아주 지속적으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한 때는 이 참담함을 견디기 힘들어 모아놓은 수면제를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은 적이 있었다. 결국 응급실 간이침대에서 내장이 거꾸로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또 다른 극한체험을 겪으며 처절하게 후회하는 멍청한 결과를 낳았지만 말이다. 약에 취해 흐트러진 시야 속에서도 내 반항하는 식도 안으로 가차 없이 호스를 찔러 넣던 레지던트 녀석의 조롱 섞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세상은 어김없이 가혹했다. 그에게 나는 징징거리는 엄살쟁이에 불과했고, 죽음에 가까이 있던 순간마저도 동정받지 못했다. 아, 나는 동정 없는 세상에 살고 있었지.
수면제나 신경안정제는 생명에 위협적이라기보다는 뇌에 문제를 일으켜 고통만 가중시킨다는 의사의 말에 나는 다른 방법을 간구하기 시작했다. 손목을 그어버린 다든가 칼로 배를 쑤신다는 건, 피만 봐도 속이 울렁거리는 내게는 그저 영화 속 머나먼 일일 뿐이다. 목을 맨다는 건 혀를 쑤욱 내밀고 공중에 대롱대롱 달려있을 흉측함이 끔찍해 못하겠고, 떨어져 죽는 건 고소공포증이 심해 엄두도 못 낸다. 독극물? 어디서 구해야 할지 답도 없다. 사실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가장 큰 이유는―어설픈 변명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널브러져 죽어있는 나를 발견할 누군가에게 지울 수 없는 큰 충격과 상처를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평생 잊히지 않을 끔찍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고통을 왜, 무슨 자격으로 그 누군가에게 짊어지게 해야 하는 건가. 홀로 고귀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는 걸까?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장미꽃 가시에 찔린 것이 덧나서 백혈병의 원인이 되었고, 결국 그가 원하던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장미꽃이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이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잠도 아닌 기꺼움이여.
릴케의 묘비명에 새겨진 자작시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낭만적인 완벽한 죽음인가! 나에게는 이런 우연의 행운이란 오지 않는 걸까? 내게 상의 한 마디 없이 생명이란 굴레를 덮어 씌운 신을 향해 다시 가져가라고 구걸이라도 해야 하나? 신은... 존재하기는 하는가.
태어난 순간부터 열렬한 예수쟁이였던 내가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하는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정말 지독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병마와 싸워 이기지 못하는 나약함도 실망스럽지만 그동안 봉사활동에, 전도한답시고 다른 이들을 권면하려 했던 오만방자함에 대한 후회가 더 가중된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종교는 내게 가르쳐왔다. 착하게만 살면 언젠가 세상이 알아줄 거라고. 설령 세상이 등을 돌려도 신만은 진심을 알고 있으며, 마침내 선은 승리하고 악행은 심판받으리라 약속했었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렇게 돌아가던가. 권선징악? 그건 구한말 이전의 세상에서나 가끔 일어나던 일일 테지. 현대사회에서는 누가 악한 자이고, 누가 선한 이인 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다. 선이 악을 이기는 모습은 영화 속, 그것도 기독교적 문화가 뿌리 박힌 미국의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다. 늘 선한 영웅이 온갖 고초를 견뎌내고 승리를 이루는 이야기는 더 이상 현대의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그런 상업주의적 영화 뒷면에 숨어있는 우리들의 실상은 꽤나 처참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어른들의 정치적 이기심 때문에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나가고, 중동에서는 종교적 배타심으로 서로를 향해 총을 난사하는데. 세계의 권력인 미국은 평화의 사절단인 것처럼 세상을 현혹시키고 뒤에선 무기를 팔아 배를 채워왔는데, 탐욕의 과부하가 걸린 낡은 여객선은 꽃다운 학생들을 씹어 삼켜 진도의 저 차디 찬 바다 한가운데로 침몰해버렸는데 말이다.
사실 세속의 부당함을 표현하는데 이렇게 거창한 이유를 댈 필요도 없다. 성공을 위해, 또는 내가 손해 보지 않기 위해 너무도 당연하게 악행―심지어 그것이 선이라고 착각까지 하면서―을 서슴지 않는 자들이 주변에 널려있다. 그들은 언제나 건재하고, 심지어 세상의 능력자로 추앙받기까지 한다. 악한 자와 악한 자를 동경하는 자, 조금 덜 악하다고 스스로에 관용을 베푸는 자, 약간의 악함을 보상처럼 허용하는 자. 세상은 이들이 이끌어가고 있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고통을 줄여줄 줄 알았던 신은 내게서 고통을 견디는 힘조차 앗아가 버리더니 이제 와 종교가 인간이 창조해 낸 가장 드라마틱한 희극임을 깨닫게 했다. 얼마나 잔인한 신인가? 인간의 죄를 신께 묻고 있다고? 억울하면 나타나 보시든가.
프랑스의 극작가 몰리에르는 그의 희곡 <인간 혐오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을 증오해.
어떤 부류는 고약하고 악의적이기 때문이고
또 다른 부류는 고약한 아첨꾼들 앞에서
미덕을 가진 사람이라면 악행을 보고 당연히 가져야 하는
엄격한 증오심을 발휘하지 않기 때문이지.
………중략………
그자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고 수작을 부리면
아주 점잖은 사람들도 당해낼 도리가 없어.
이런 악행을 보고서도 사람들이 신중하게 대응한다면
나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지.
그래서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를 폄하하고, 지키지 않고도 아무렇지 않아하는 우둔함을 더욱 폄하한다. 거짓말을 일삼는 자를 혐오하고, 거짓에 동조하지 않음을 욕하는 뻔뻔함을 더욱 혐오한다. 약한 자를 짓밟고 이용하는 자를 증오하고, 강한 자에게 아첨하는 자를 경멸하며, 강한 자 뒤에서 그를 비꼬는 속물근성을 더욱더 저주한다. 나는 되도록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 살아가려 노력했고, 이런 나의 작은 노력들을 주변인들과 공감하며 진심이 통하는 살아볼 만한 세상을 기대했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의 무기력만 깨닫고 실패했고 어리석게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증오심으로만 가득 차게 됐다. 나는 너무나 무능력하고 나약하다. 고귀한 정신이나 지성이 약자가 되는 참담한 현실을 참아낼 재간이 없다. 이런 현실이 세상의 진리라면 나는 사회 부적응자, 혹은 부적격자로 스스로를 정의 내릴 수밖에 없다. 결국 도망쳐버리거나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꼭꼭 숨고 싶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하다. 아마도 이런 나의 간절함이 물속으로 파고드는 꿈을 꾸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도 원하던 고독한 심연 속에서도 비정한 종교가 강요했던 사랑과 용서, 배려와 희생을 실천하기 위해 신데렐라 콤플렉스 속에서 착한 척 참고 살아온 나 자신이 역겨워, 또 내게 상처를 준 세상에게 하지 못한 욕지기들이 모래가 되어 내 목구멍을 그리도 틀어막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 고통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어떤 희망이나 꿈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기에, 어떻게든 이 고통을 끝내야만 한다.
어느 추운 날,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땅을 파고 누워, 얼어 죽어도 못 깨어날 만큼의 수면제를 먹은 뒤 고요하고 근엄하게 최후를 맞이할까도 생각한다. 여태껏 내가 도달한 가장 그럴듯한 방법이다. 아, 그런데 내가 침범하고 파헤친 흙속의 원주민들이 대동 단결하여―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은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면 어떡하지? 상스럽게 달린 수많은 까칠한 다리들을 번다하게 움직여 내 아킬레스건을 타고 올라 무릎의 언덕을 넘어 내 사타구니로, 내 더 깊은 곳으로 침투해 오기라도 한다면? 역시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 나는 비열한 인간만큼이나 벌레가 정말 싫으니까. 그래, 나는 겁쟁이다. 위선자다. 비겁한 루저다.
벌레에 대한 극심한 혐오는 아마 초등학교 6학년쯤부터 시작된 것 같다. 나는 그 당시 숙제를 마치고 나면 어머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주셨던 세계문학 전집을 하나씩 꺼내어 보곤 했는데, 그때 밤을 새워가며 읽었던 브론테 자매의 <폭풍의 언덕>이나 <제인 에어>, 민망함에 부모님이 주무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불속에 웅크리고 읽었던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나 에밀 졸라의 <나나>―‘핑크빛 젖꼭지’ 같은 표현을 읽을 때의 충격과 긴장감은 아직도 생생하다―등의 고전문학들은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들끓는 호기심을 충족시켜줬다. 탐독 생활에 열중하던 어느 날, 책장에서 기이한 제목으로 시선을 끄는 한 단편집을 빼어 들었다. 어려울 것 같았지만, 다소 짧은 분량에 용기를 내어 읽기 시작했고, 방 안에 갇힌 채 벌레가 되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는 그동안의 어떤 사랑이야기보다 더 빠르게 몰입되기에 충분했다. 특히 그의 기름기 흐르는 빤질빤질한 겉껍질과 흉측하게 달린 여러 개의 다리들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당시 유난히 겁이 많고 결벽증이 있던 나는 낡은 우리 집에 출몰하던 바퀴벌레들 때문에 이미 상당 수준 고통받고 있었는데, 이 책은 나를 신경쇠약 직전까지 몰아세우더니 매일 밤 거대한 바퀴벌레로부터 습격을 받는 악몽과 가위눌림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때로는 몸을 다 덮을 만한 대형 벌레가 숨 막히도록 짓누르고, 때로는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벌레들이 소름 끼치게 공격해왔다. 좀비 바이러스처럼 퍼져 벌레로 변해가는 팔다리를 보면서 목 놓아 울기도 많이 울었다. 밤마다 잠에 드는 것이 휴식이 아니라 고통이 되었고, 그 공포와 불쾌감은 그 시절 어린 소녀의 감성을 통째로 지배했다.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고 그깟 벌레 따위에 뭘 그리 호들갑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철 모르는 13살의 세상에서는 거의 절망 수준의 고민거리였다. 어쩌면 너무 어린 나이에 어려운 문학작품을 접한 건지도 모르겠다. 작품이 지닌 철학적 소양을 알아차리기보다 이미지만이 부각되어 병적 벌레 혐오증을 불러일으키는 부정적 결과를 낳았으니 말이다. 결국 그 혐오증은 성인이 되어 정말 우울과 신경쇠약증에 걸려버린 내게 하루 종일 벽에 벌레를 그리는 강박 증상을 선사했다. 나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벌레에 대한 그리움인지, 복수심인지 모를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 정신없이 그림에 집착했다. 방안의 벽들이 온통 잉크 벌레들로 시커메졌을 때 다시 한번 카프카의 <변신>을 꺼내 읽었다. 무기력한 벽의 벌레들도, 사회 부적응자인 나도, 그레고르와 무척 닮아있음을 깨달았다. 그제야 비로소 카프카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어느새 태양빛은 검정 잉크 벌레들 주변을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1분은 생각보다 천천히 오는데, 1시간은 훌쩍훌쩍 다가온다. 아니, 1시간은 더딘데 하루는 급히 지나든가, 하루는 느려도 세월은 빠르든가? 시간에 대한 개념은 사람마다 주관적이겠지만, 내 시곗바늘은 지긋지긋한 늦장을 부리면서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초고속으로 달아나 버린다. 느리다고 느낄 때는 짜증 나면서, 빠르다고 느낄 때는 무섭다. 이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은 허무에서 비롯된 걸까, 희망에서 생겨나는 걸까. 지금의 나에게 시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살바도르 달리가 <기억의 고집>이라는 그림에서 조롱했듯 엄밀하게 측정되는 시간이라는 것이 사실 흐물흐물한 카망베르 치즈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면, 검정 개미들의 먹잇감이 되어 곧 사라져 버릴 운명이라면, 도대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냔 말이다. 곧 다가올 어둠에 대비해 나는 침대 맡의 전등을 켠다. 딸깍거리는 스위치 소리에도 불빛은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전원코드를 살피기 위해 일어나려는데 웬일인지 다리가 전혀 움직이질 않는다. 아직도 가위에 눌려있는 걸까. 어차피 조금만 있으면 다시 밤이다. 일어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겨우 손을 뻗어 아끼는 향초에 불을 붙인다. 메케한 연기가 나다 이내 싱그러운 유칼립투스 향이 방안을 가득 메운다.
촛불이 벽에 만들어내는 아른거리는 실루엣을 보고 있자니, 어린 날 우연히 TV에서 봤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스펠바운드>란 흑백영화가 떠오른다. 프로이트의 Guilty Conmplex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꿈을 살바도르 달리가 초현실적인 예술작품처럼 표현해낸 장면은 기괴함 그 이상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었다. 늘 집안 어딘가에 굴러다니던 구겨지고 빛바랜 해몽 책을 볼 때처럼 묘하고도 강력하면서, 실체가 없는 뻐근한 두려움,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어머니가 가끔 꺼내보시던 그 해몽 책의 앞표지는 마크 샤갈의 <도시 위에서>, 뒷면은 <생일>이 인쇄되어 있었는데, 원초적인 칼라와 몽환적인 분위기가 어쩐지 사찰이나 신당을 지키는 형형색색의 수호신들처럼 으스스해서 늘 그 책과 마주하기를 두려워했었다. 질끈 눈을 감고 책을 열어 겉표지를 바닥에 딱 붙인 후에야 비로소 눈을 떠 책 내용을 읽어보곤 했을 정도다. 그러고 보니 내 어린 시절은 온통 공포로 가득했다. 나는 책을 봐도 무섭고, 그림을 봐도, 영화를 봐도 무서웠다. 밤만 되면 귀신이 나타날까 봐, 잠에서 깨면 혼자인 것이 무서웠고, 생면부지 친척 어르신의 장례식에서도, 우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안 준다는 크리스마스 때도,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누가 아이들이 세상천지에 가장 해맑고 행복한 존재라고 했던가. 아이들에게 세상은 낯설고 두려운 존재다. 매일매일이 난생처음이니 스트레스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던 것 같다. 다른 아이들도 나처럼 겁쟁이였을까? 태어날 때부터 공포라는 감정은 주어지는 걸까, 학습되는 걸까? 경험해보지도 못한 고독, 죽음, 귀신, 지옥 등에 대한 공포심은 과연 어디서 오는 거지? 대체 그것들이 왜 무섭게 느껴졌을까? 뭔지는 알기나 하고 그랬을까? 무섭다는 것은 실체가 없는 감정이다. 그래 봤자 벌레일 뿐이고, 내가 벌레로 변할 확률은 거의 없고, 정말 잘못돼봤자 죽는 건데, 죽으면 무섭고 말고도 없을 텐데, 대체 뭐가 두려운 걸까? 두려움의 근원은 무엇이냔 말이다. 고통인가? 죽어버리면 더 이상의 고통은 없을 텐데 왜 죽음 앞에서 나는 망설이는 걸까? 아마도 지속적인, 끝나지 않을 고통을 피하고 싶은 거겠지. 고통을 멈추기 위해 죽었는데, 더 무시무시한 고통으로 영원할 거란 지옥의 저주가 두려운 거겠지. 지옥이 바로 모든 두려움의 시초이자 종착지다. 대체 누가 천국과 지옥을 나눠놓은 거지? 망할 놈의 종교.
생각이 이렇게 꼬리를 물고 방향 없이 순환하다 보니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다. 약의 부작용으로 온몸은 전기 고문을 받는 느낌이다. 또한 끝도 없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오금이 저리고 영원히 이완될 것 같지 않는 긴장상태의 연속이다. 몹시 힘들다. 지금의 고통을 없앨 수만 있다면 지옥이고 천국이고 무슨 상관인가. 이 빌어먹을 놈의 몸뚱이는 저주받은 게 분명하다. 목울대를 메운 천년 묵은 욕지기는 천식 환자가 밭은기침을 내뱉듯 툭툭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지금 당장 죽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일 것이다. 용을 쓰느라 접혀있던 미간을 손등으로 쓸어내다 순간 코웃음이 난다. 주름살 따위에 연연하는 모습이라니, 아직은 삶에 대한 미련이 있다는 뜻인가. 땀으로 흥건해진 손을 더듬어 베개 옆에 처박혀 있는 오디오 리모컨을 누른다.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팔리아치≫에서 주인공 카니오가 부르는 유명한 아리아 <의상을 입어라>가 흘러나온다. 나는 수년 전 우연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호세 카레라스의 처절하고도 가슴 저미는 목소리에 그만 가던 길을 멈추고 한동안 멍하게 있던 적이 있다. 이 곡의 작곡가도, 배경도, 내용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 통탄에 젖은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 듯 슬프고 아렸다. 그 뒤로 이 아리아에 빠져 한동안 다른 아리아들로부터 편애를 심하게 했다.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주세페 자코미니, 특히 최고의 카니오라는 평을 듣는 엔리코 카루소의 버전도 찾아서 들어 보았지만 역시 나의 첫 번째 카니오인 호세 까레라스의 내장을 긁어내는 듯한 심적 고통의 자극을 내게 선사하진 못했다. 지극히 주관적 상황에서 오는 선입견임을 알면서도 한 번 빠져버린 매력에서 헤어 나오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이 아리아는 광대 카니오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아내를 목격하고도 무대에 올라 광대를 연기해야 하는 비참한 심리를 한탄하는 노래다.
연극을 하자고! 미칠 것 같은 이 꼴로,
지껄이는 짓도 연기하는 것도, 난 전혀 기억이 없다.
그래도 억지로 해야겠지.
아, 그래도 네가 사내냐.
광대 꼴답다.
의상을 입어라, 하얀 분을 발라라!
손님들은 여기에 돈을 내고 웃으러 온다.
아르레끼노가 내게서 콜롬비나를 빼앗아간다면,
웃어라 팔리아초, 모두가 손뼉 치고 야단이겠지!
괴로워 흐느낌이 치솟으면 우스갯짓으로 바꿔라.
흐느낌으로 가슴이 아프면 찡그린 얼굴로 바꿔라.
오, 웃어라 팔리아초, 너의 깨져버린 사랑 때문에.
웃어라, 가슴 찢어진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에도 타인의 우스갯거리가 되어야만 하는 광대의 울부짖음은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아이러니에 대한 풍자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세상은 만만치 않고 삶은 고행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포기 대신 광대 분장 속에서 웃는 걸까? 명장의 반열에 오른 드라마틱 테너가 연주해내는 카니오의 절규는 나를 지배하던 통증을 잠시 잊게 할 정도로 폐부 깊숙이 파고들어온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순간, 내 고통의 정도를 가늠해 보게 된다. 과연 나의 고통은 충분한가?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만큼?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 죽어가는 사람들, 희귀 병에 걸려 진통주사와 엄청난 양의 약으로 연명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죽음 앞에 초연한 사람은 드물다. 정말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 앞에서도 살고자 애를 쓰는 모습을 많이 봤다. 80이 훌쩍 넘은 폐암 말기의 내 할머니도 스러져가는 호흡을 다잡으며 삶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셨다. 그들에 비하면 사지육신이 멀쩡한―심히 억울하지만 적어도 눈으로 확인되는 증상이 없고, 원인을 알 수 없어 의사들도 흔히 ‘신경성’이라고 치부하니 어쩔 수 없다―나는 왜 죽음을 꿈꾸는 걸까? 어째서 죽음 앞에 초연한 척 위선을 떨고 있냔 말이다. 내 통증의 원인이 잘 알려진 난치성 질병이고, 곧 죽게 되리라는 명확한 진단을 듣는다면, 나는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일까? 그때가 되면 삶을 꿈꾸게 될까? 혼란스럽다.
차분한 마음으로 내 삶을 되짚어본다. 무엇 하나 의지대로 완주한 적 없는 삶. 그 짧은 생의 졸렬함에 민망해진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최선의 행동이 무엇인지 알면서 이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 즉 아크라시아(Akrasia)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만약 악행을 저질렀다면, 그것은 무지로부터 비롯한 행동이기에,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결코 최선의 판단에 반하는 행동을 할 리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인 인간이라도 결국 유혹에 빠지고 다른 욕망에 휩싸여 그 본질을 잃고 최선이 아닌 다른 방향의 결과물을 내는 경우는 허다하다. 나야말로 아크라시아가 실재함을 몸소 증명해온 삶 아닌가. 의지박약은 허울 좋은 자기 합리화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올 줄을 모르는 채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내가 죽고 싶은 것은 아크라시아다. 아직 죽지도 못하고 구구절절 변명만 늘어놓는 것 또한 아크라시아다. 어설픈 줄 알면서도 유치한 지적 허영을 부려보는 것도 아크라시아다. 세상에 나가 사람들과 부딪히고, 고생하며 일하는 것이 싫어서,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대신 침대 위의 통증을 선택한 비겁함이 바로 아크라시아다. 입 안 가득 모래를 머금고 깊고 어두운 물속에서 버둥거리던 꿈 또한 아크라시아다.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못된 병에 걸린 게 아니라 병에 걸린 나를 선택한 것이다. 고로 나는 나을 수 있다. 아프지 않은 건강한 나를 선택하면 그만이다.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진다. 마침 오디오에서는 레온카발로의 아리아가 끝난 후,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나오는 <사랑과 죽음>이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흘러나오고 있다. 서서히 절정으로 치닫는 현악의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나의 감정 또한 상승한다. 받아들이기에 벅찰 정도로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다. 눈앞에 불꽃이 일어난다.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 속의 불꽃은 주변을 집어삼킨다. 몸이 뜨거워진다. 타는 냄새마저 나는 것 같다. 자연발화 현상이라도 일어나는 건가? 감정의 폭주는 굳어버린 나의 몸에 금빛 날개를 달아 태양을 향해 쏘아 올린다.
숱한 못을 넘고, 골짜기 넘고,
산을, 숲을, 구름을, 바다를 넘어,
태양도 지나고, 창공도 지나,
또다시 별나라 끝도 지나,
내 정신, 그대 민첩하게 움직여,
파도 속에서 황홀한 능숙한 헤엄꾼처럼,
말로 다할 수 없이 힘찬 쾌락을 맛보며
깊고 깊은 무한을 즐겁게 누비 누나.
이 역한 독기로부터 멀리 달아나
높은 대기 속에 그대 몸 씻어라,
그리고 마셔라, 순수하고 신성한 술 마시듯,
맑은 공간을 채우는 저 밝은 불을.
안개 낀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권태와 끝없는 슬픔에 등을 돌리고,
고요한 빛의 들판을 향해 힘찬 날개로
날아갈 수 있는 자 행복하여라;
그대 생각은 종달새처럼 이른 아침
하늘을 향해 자유로이 날아올라,
--삶 위를 떠돌며 꽃들과 말없는 사물들의 언어를
힘들이지 않고 알아낸다!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 중 <상승>이라는 시다. 자신의 탄생 자체가 저주라고 말하던 지독히도 삐뚤어진 천재 시인 보들레르가 행복을 말한다. 고독, 우울, 권태, 모멸 등의 정서로 똘똘 뭉쳐있던 그가 희망을 말한다. 거친 성품과 화려한 여자관계로 사람들에게 논란의 대상이었던 바그너가 오직 음악이라는 예술적 매개체만으로 지친 나의 어깨를 들어 올린다. 이들 또한 고통의 삶을 살지 않았는가. 어떤 이는 고립된 혹독한 삶 속에서, 어떤 이는 사랑의 열병 속에서, 또 누군가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 혹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삶을 살아나간다. 권태롭고 우울한 내 인생의 뒤틀림도 그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가장 깊은 심연의 바닥을 힘차게 딛고 일어나라. 이제는 올라갈 일만 남았다. 종달새처럼 저 높이 올라가 저 밑에선 알 수 없던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드디어 나는 세상으로의 회귀를 계획한다.
눈물을 훔치고 나니, 어마어마한 광원이 나를 비추고 있다. 외로운 고통에서 벗어나 고독을 즐기는 각자(覺者)로서의 나를 꿈꾸는 지금, 방안은 용광로처럼 불타오른다. 향초에서 커튼으로 옮겨 붙은 불은 4평 남짓한 작은 방의 서가를, 목재 가구들을, 벽의 검정 잉크 개미들을 삽시간에 태워버린다. 감각이 없던 다리가 이제는 참혹한 고통으로 몸부림친다. 이미 체모들은 뜨거운 열기에 바스러져버리고, 살갗은 수포가 올라온 지 오래다. 이렇게 잔인한 고통이 있을 줄은 몰랐다. 지옥의 공포는 이런 것이리라. 점점 피부가, 근육이, 뼈가 녹아내린다. 입술이, 눈꺼풀이 촛농처럼 흘러내린다. 나는 불에 타 죽고 있다. 이건 아니지. 난 죽기 싫다. 이제 겨우 악몽에서 깨어났다. 내가 왜 지금 여기서 죽어야 하나. 종달새도 타고, 물고기도 탄다. 철학자도 타고, 문학가도, 예술가도 다 타 들어간다. 살고 싶다. 죽도록 살고 싶다.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다........... 신의 복수인가?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사라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