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멘탈의 붕괴
어느 날부터인가 굉장한 악몽들을 꾸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부터 잠을 깊게 자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와 함께 안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가위에 눌려서 내 머리맡에 뾰족한 모자를 쓴 마녀가 앉아 있었던 꿈을 꾼 것이었다. (마녀가 있어서 가위에 눌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부터 나는 잠을 잘 때마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꿈을 꾸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가위에 눌리고 환청과 환영으로 귀신 비슷한 것들을 보고 듣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가위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어느 날은 잠에 들기 위해 누우면서 '아, 오늘은 가위에 눌리겠구나'라고 예상까지 할 정도였다.
주로 내가 꾸는 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들을 학살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시설이라든지 낡은 건물 지하의 아주 더러운 화장실이라든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갇힌다든지 테러의 현장에 있다든지와 같이 '죽음'의 어떤 형식들이 시각화되어 나타나는 식이었다. 아마도 어릴 적에 읽은 <안네의 일기> 같은 책들이 나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이런 나의 불안정한 잠버릇들은 신기하게도 결혼을 하고부터 어느 순간 휙 하고 사라졌다. 일단 남편과 같이 잠을 이루면서부터 가위에 눌린 적이 없었다. 꿈을 꾸는 것은 여전했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내가 너무 괴로워한다는 것을 인지할 정도로 불쾌한 꿈을 전처럼 많이 꾸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에게 있어 가위에 눌리지만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다시 시작된 것이다. 논문을 쓰면서부터 그 악몽들이 나를 찾아온 것이.
물론 나는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 나를 압박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마감일은 다가오고 있는데 나는 너무 느렸고 가장 중요한 본문의 3장, 앞서 이론들을 정리하고 내 논지에 맞게 구성한 것들을 통해 드디어 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그 3장이 미완이었다. 나는 기존의 이론과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매끄럽게 이어 줄 조각을 찾아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원서를 참고해야 했다. 다행히 그 원서는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였지만 1분 1초라도 아쉬운 이때에 영어 단어를 찾아가며 원서를 읽고 그것을 이해하고 내 언어로 다시 풀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큰 부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렵게 찾아온 논문 심사의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무조건 내게 주어진 시간에 이 모든 것들을 해내야 했다. 그리고 바로 이 '무조건'이라는 상황이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내가 첫 번째로 꾼 꿈은 수많은 벌레가 내 앞에서 득실대던 꿈이었다. 바퀴벌레 같은 것도 있었고 초파리 같은 것도 있었다. 나는 파리채 같은 것으로 벌레들을 퍽퍽 쳐대면서 죽이려고 했는데 워낙 양이 많아 택도 없었다. 파리채로 죽이면 벌레들이 터지면서 피 같은 것들을 튀겼다. 두 번째 꿈은 내가 피를 많이 흘리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꿈이었다. 이미 얼굴 근육은 굳어가는 상태였는데 남은 힘을 쥐어짜서 유언을 남기려고 아이폰 음성 녹음 앱을 열었는데 폰 용량이 꽉 차서 유언을 남기지 못한 슬픈 꿈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꿈들은 삼성동 코엑스에서 테러가 발생해서 내 눈 앞에서 테러리스트들이 장총을 쏘고 사람들이 다 도망치는 꿈이나 테러리스트들을 피해 어떤 병원 건물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병원 밖에서 건물을 폐쇄해서 병원에 남은 몇 안 되는 중환자들과 내가 건물에 갇히는 꿈같은 것들이었다.
내가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경미한 수준의 공황장애는 아닐까 하고 의심을 했던 이유는 예전에 <무한도전>에서 개그맨 정형돈 씨가 심리 상담을 받는 내용이 나왔는데 국민 프로그램을 하면서 많은 압박을 받고 있었는 데다가 쌍둥이 자녀를 낳고나서부터 방송인으로서의 불안정한 수입 때문에 굉장히 불안한 상태였다는 것을 그가 꾼 꿈들을 통해 진단을 받는 내용이었다. 그 꿈은 벌레들이 잔뜩 나오는 꿈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정형돈 씨가 공황장애를 겪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물론 벌레가 나오는 꿈을 꿨다고 해서 바로 공황장애인 것은 아닐 테지만 이런 악몽들을 연속적으로 꾼 것과 더불어 가끔씩 컴퓨터 앞에 앉아서 논문을 쓰려고 하는데 잘 풀리지 않을 때 귀가 먹먹해지면서 삐- 하고 이명이 들리던 나의 증상들 때문에 더 의심이 갔던 것이다.
나의 이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계기는 서울에 간 김에 기분 전환 삼아 광화문 씨네큐브에 영화를 보러 갔을 때였다. 씨네큐브 2관은 상영관이 작고 앞뒤 양옆 객석의 간격이 좁아서 상영을 위해 불이 꺼지면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드는 정도였는데 그 날은 답답함을 넘어 급격한 불안이 나를 덮쳐 왔다. 불이 꺼지기 시작하는데 뭔가 내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나는 눈으로 비상구를 찾아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나갈 통로를 확보하고자 했다. 입이 마르고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런 느낌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워서 얼른 영화에 집중해 이 기분을 떨쳐내고자 했다. 다행히 영화는 흥미로웠고 장면 장면이 바뀔 때마다 어두워지는 화면에 다시 불안감이 닥쳐오기도 했지만 그 시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사실 언제라도 이런 증상이 시작되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미 내 멘탈은 논문을 쓰기 위해 학교로 다시 되돌아간 그때부터 그것이 감당할 수 있는 용량의 한계치에 다 달아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나는 멘탈이 강하지 않아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을 웬만하면 회피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이런 강도의 압박은 나에게는 매우 치명적이었다.(나는 취업 스트레스 때문에 24살의 어린 나이에 꽤 심각한 수준의 대상포진에 걸린 적도 있었다) 결국 내 멘탈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장렬히 전사하였다. 가끔 인생의 여러 고비들은 우리에게 생채기를 내고 그 생채기들을 버텨 내며 우리는 더욱 강해진다고 하는데, 이건 자잘한 스크레치나 잽이 아니라 그냥 업어치기 한판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논문 쓰기를 중단했다거나 포기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멘탈이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근근이 버텼다는 것이다. 논문이 주는 스트레스는 논문을 다 써야만 끝이 난다는 만고의 진리를 되새기며.
졸업한 지 2년이 가깝게 흘렀지만 아직 나의 멘탈은 회복 중이다. 아니, 영원히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최근에도 논문 최종 심사에서 떨어지는 꿈을 여러 번 반복해서 꾼다. 갇혔다는 불안감에 고속버스는 타지도 못한다. 그때의 괴로움이 생각나 이미 인가된 내 학위논문을 제대로 읽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한편으로 지금 내가 쓰는 이 논문일기는 나에게 있어 치유의 글쓰기이다. 내가 가장 잊고 싶은 기억들을 꺼내어 다시 나의 언어로 써 내려가는.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창작과 창조성의 근원인 악몽들과, 그것들을 제공한 우울의 계기들이 있다는 것은 앞으로 글 쓰는 일을 본업으로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최고의 축복이 아닐까 싶다. 멘탈이 죽어 묻힌 그 땅에 피는 작은 꽃처럼. "누가 알랴, 내가 꿈꾸는 새로운 꽃들이 모래톱처럼 씻겨 나간 이 흙 속에서 신비로운 자양을 찾아 내어 활력을 얻을 수 있을지 말지?"*■
* 샤를 보를레르, <원수>, «악의 꽃», 황현산 역, 민음사, 2016, p.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