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과정

매일의 경건한 의식

by 서수

다행히 가을학기 끝무렵에 치러진 프로포절 심사에는 통과를 했다. 아직까지 고쳐야 할 점도 많고 읽어야 할 텍스트도 남아 있지만 한 단계는 무사히 넘긴 것이다.(가장 큰 문제는 내가 도입한 새로운 공동체 이론을 적용할 적당한 예술작품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내가 구성한 목차대로 본문을 드디어 '쓰는' 것이었다. 1년 남짓 텍스트를 주구장창 읽기만 하면서 쓸 내용들을 머릿속에 저장해왔다면, 이제는 축적해 온 나의 사유들을 글로써 풀어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꼼꼼한 사람도, 계획적인 사람도 아니어서 내가 세운 쓰기의 계획이란 매우 나이브한 것으로, 내게 주어진 겨울방학이라는 3개월의 기간 동안 논문을 크게 서론, 본론의 1장, 2장, 3장, 결론 등 다섯 부분으로 분할을 하고 각 장마다 1주 반의 기간을 할당하는 것이었다. 왜 1주 반밖에 할당할 수 없었냐면, 당시 서울에서 살던 신혼집의 전세가 끝나고 이사를 해야 하는데 남편이 대전에서 박사를 시작하게 되어 대전으로 이사하는 큰 일을 치러야 하는 데다가, 기혼자의 신분으로 해야 하는 것들, 예를 들어 시부모님의 환갑 기념 여행으로 2주 동안 해외를 나갔다 와야 하는 일이나 2월에 있을 구정 연휴에 시간을 빼놓아야 하는 것 등등이 있었으므로 실질적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던 것이다.

뿐 아니라 논문의 초고를 쓰는 것 이외에도 교수님께 보여드릴 요약 발표문도 준비해야 했고, 내 논문의 심사위원 중에 프랑스 미학을 가르치고 계신 우리 과의 외국인 교수님이 계셨으므로 영어로 된 발표문을 준비해야 했다. 우리 말로도 어려운 내용을 영어로 작성해야 한다는 것은 내게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므로 나는 번역 시간을 벌기 위해 국문으로 된 초고와 요약문을 최대한 빨리 완성해 놓아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본격적인 논문 쓰기에 돌입했다. 남편을 제외하고 아는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없는 낯선 지역에서 홀로.


이러한 환경적인 요인은 의외로 큰 도움이 되었다. 남편이 학교에 간 뒤 나는 빈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아침부터 밤까지 오롯이 쓰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철저한 고립과 적막 속에서 나는 매일을 기계처럼 생활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간단한 식사를 하고 드립 커피를 내리면서 커피 향으로 두뇌를 깨웠다. 그리고 오래 앉아있어야 하고 오래 생각해야 하는 이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내 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요가를 등록해서 아침마다 1시간씩 요가를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나름의 규칙적인 행위를 경건한 의식처럼 행했다:

1. 논문 폴더를 연다.

2. 어제 작업한 파일을 복사한 뒤 오늘 날짜로 새로 저장한다.

3. 오늘 날짜의 문서를 열고 참고문헌 파일들을 열고 인용할 책을 편다.

4. USB를 꽂는다.

5. 초콜릿을 먹으며 심신을 안정시킨다.
6. 더치커피를 물에 희석하지 않고 곧바로 마신다.


물론 이런 행위 뒤에 바로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글을 시작함에 있어 예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나긴 침묵과 같은 빈 페이지에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짧게는 1시간에서 길게는 12시간까지 필요한 적도 있었다. 오늘 내가 써야 하는 내용을 위해 그에 해당하는 텍스트를 읽고 내가 정리해서 메모해 둔 내용들이 제대로 된 것인지 점검하면서 일단 핵심 단어와 문장들을 떠올려 본다. 단어가 문장을 구성하고 문장들이 문단을 구성하고 문단들이 하나의 장을 구성한다. 하나의 문장이 담고 있는 내용은 곧바로 따라오는 문장과 논리적으로 연결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필요한 적절한 접속사를 고민한다. 생각보다 우리말의 접속사는 쉽지 않다.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사용하지만 논리적인 글에 있어 접속사는 잘못 사용하면 그 즉시 문장들은 내가 의도한 맥락에서 벗어난다.


보통 내가 속한 세부 전공에서 논문의 양은 한글 프로그램에서 A4 규격으로 80페이지를 적당한 수준으로 본다. 이 A4 규격 80페이지는 논문 규격인 B5로 변환했을 때 약 100페이지가 된다. 그리고 이 100페이지의 앞과 뒤에 국문 초록, 목차, 영문 초록, 참고문헌 목록, 참고도판 목록이 붙는다. 80페이지를 채우는 일은 어려웠다. 나의 나이브한 계획에 따르면 본 논문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서론에 5페이지, 논문의 핵심 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하고 그 의의와 한계를 자평하는 결론에 5페이지를 할당하고 난 뒤 남은 분량인 70페이지는 본문의 1,2,3장에 각각 24페이지 정도로 할당된다. 그리고 나는 이 24페이지를 꼬박 1주 반 만에 채워야 하니 하루 종일 붙잡고 있어도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써야 한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겨울방학이 지나자마자 3월이 되면 나는 논문자격시험을 치러야 하고 이 시험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 역시 필요하므로 3월 전에는 초고가 다 완성이 되어야 한다. 4월에는 전공 내에서 시행하는 예비 심사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5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바로 그 계절에 나는 화사한 봄날의 햇볕이 가득한 심사장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는 일단 넣어 두고 문장을 시작하도록 나 자신을 닦달한다.


"20세기는 참으로 여러 이데올로기들이 충돌했던 시대였다."로 시작되는 문단을 완성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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