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적인 자극

김연아와 베토벤

by 서수

또다시 봄이 찾아왔다. 다른 점이라면 작년 봄은 연구실에서 논문 주제 찾기에 급급하여 텍스트 읽기에 바빴다면 이번 봄은 새로 이사한 집에서 논문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학위논문에 있어 8할은 텍스트 리딩을 하며 내 사유를 정리하는 것이었고, 논문을 직접 쓰는 것은 2할밖에 차지하지 않았다. 시간적으로도 코스웍 기간 포함 4년은 내가 관심 있는 이론을 좀 더 깊이 있게 읽고 정리하는 시간이었다면, 논문을 쓰는 시간은 초고 완성에 3개월, 논문 심사 학기까지 포함하면 6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봄에 논문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밀고 나갔기 때문이고 만약 내가 좀 더 천천히 쓰고자 했으면 그다음 학기로 심사를 미룰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때 이미 나는 대학원에 입학 한 지 4년이나 지나 있었고 엄청난 대작을 완성할 것이 아니라면 굳이 돈과 시간을 더 소모하면서까지 석사학위논문에 매진할 이유는 없었다.


대전에서 독야청청 논문 쓰기에만 매진한 지 세 달 정도가 지나자 나는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잃어버린 채 '나는 누구, 여긴 어디'하며 진공 상태에서 부유하는 기분이 들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보다는 시간에 맞춰 분량을 채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 커지면서 아무 감정 없는 로봇처럼 빈 페이지를 한글로 채워 나가고 있었다. 나의 내부에서는 아무런 동요가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그리하여 나는 외부에서 강제적으로 나를 감정적으로 자극시킬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매일 나는 유튜브를 통해 김연아 선수의 경기 장면과 베토벤의 교향곡 시리즈를 찾아보면서 나에게 열정을 투약했다. 왜 그 둘이냐 하면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이들은 나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김연아 선수의 스케이팅의 완벽함과 아름다움이야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들 알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라고 신나게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스텝 시퀀스이다. 김연아 선수 이전의 피겨 스케이팅에서는 사실 점프에서 실수가 있느냐 없느냐만 집중했다면 김연아 선수 이후부터는 점프의 완벽함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전에는 점프와 점프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로만 생각했던 스텝 시퀀스라는 존재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뿐이었다. 한 발, 또 다른 발을 바꿔가며 아이스링크를 부드럽게 때로는 강렬하게 가로지름과 동시에 긴 팔의 쉼 없는 동작과 특유의 풍성한 표정으로 스텝 시퀀스를 풍요롭게 가꾸어 간다. 그래서 보고 있노라면 팔에도, 다리에도, 발에도 감정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하여 김연아 선수의 프로그램은 그 시작부터 끝까지 연결이 끊기지 않는 하나의 완성된 마스터피스가 된다. 마치 음악이 그런 것처럼. 한 동작 뒤에 따라오는 다른 동작이 같은 맥락 안에 있어, 한편으로는 반전을 선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되돌아오는데 이 모든 흐름이 인위적이지 않아서 그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그렇게 타기 위해서만 존재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래서 <세헤라자데>, <죽음의 무도>, <007 메들리>, <피아노 협주곡 F장조>, <지젤>, <오마쥬 투 코리아>, <뱀파이어와의 키스>, <레미제라블>, <어릿광대를 보내주오>, <아디오스 노니노> 등의 영상들을 보고 있으면 그녀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대전의 한 아파트 구석에 있는 나에게 강렬하게 임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 노력과 고통의 끝에서 마주칠 아름다움을 위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여 계속해서 논문을 쓰라고 용기를 주는 것 같았다.


다른 한편으로 논문에 고립된 불쌍한 사람에게 자극을 선사해준 것은 그 유명한 <환희의 송가>가 포함된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이었다. 사실 이 곡은 너무나 유명해서 감흥이 덜 할 수도 있는데 이 교향곡이 나에게 시각적으로 각인된 적이 있었다. 코스웍을 수료하고 나서 지도교수님의 학과 교양 수업에 조교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 수업의 PPT에 들어가는 영상 중에 <카핑 베토벤>이라는 영화의 한 클립이 있었다. 애드 해리스가 분한 베토벤이 청각을 잃은 와중에도 이 대작을 작곡하여 직접 9번 교향곡의 지휘를 맡은 장면이었다. 귀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성악가들의 입모양을 보고, 악기의 움직임을 보고,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면의 박자에 집중하여 땀을 뻘뻘 흘리며 길고도 웅장한 교향곡의 지휘를 끝마치자, 객석에서 박수소리가 처음에는 들리지 않다가 점점 우레와 같이 연주회장을 채우는 것이다. 그러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베토벤이 병상에 누워서 9번 교향곡과 아주 대비되는, 몇 개의 노트만으로 구성되는 조용하고 단순한 음률로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는 것이었다.

<카핑 베토벤> 자체는 별다른 흥행을 하지 않았지만 수업시간에 본 이 영상은 베토벤의 교향곡을 더 실제적으로 감각할 수 있게 해 주었기에 교향곡만큼이나 아름다운 전율을 선사해주었다. 그리하여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듣고 있노라면 귀가 들리지 않는 대신, 내면의 멜로디와 화성에 집중한 베토벤의 격정과 분노, 그것이 잦아든 평화와 고요, 다시 상승, 그리고 하강의 반복이 느껴진다. 내면의 평화를 찾고 그것을 <환희의 송가>로써 하나님 찬양으로 승화시키기까지 그 고독한 싸움의 치열함이, 주요 멜로디가 주는 아름다움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의 극단까지 가는 베토벤 내면의 여정이 주는 아름다움이, 그 아름다움이 주는 커다란 감동이 있는 것이다. 이 감동에 젖어 있으면 지금 나의 답답하고 이유 없이 억울한 심정이 차분해지면서 다시 한번 잘 해보자는 마음이 간신히 드는 것이었다.


이들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것이었다. 김연아 선수의 프로그램이 전혀 지루하지 않고, 링크 위에서 홀로 펼치는 경기임에도 손에 땀을 쥐며 몰입하게 되는 것은 프로그램에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역시 각각의 악장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각 악장이 가지고 있는 계기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하이라이트로 향해 가기에, 마지막 4악장에서 우리는 앞의 악장들이 마련해 준 계기들을 토대로 그 환희가 폭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인생이라는 고유한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이야기를 '스토리'로 적절히 구성하여 제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스토리텔링이라고 해서 없던 얘기를 만들어서 속임수를 쓰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이야기들을 그것들이 하나의 주제의식 안에서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적절하게 구성한다는 것이다. 흔한 말로 '있어 보이게' 말이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내용이 좋고 글을 잘 써도 그것들이 물 흐르듯이 전개되어 원래부터 그렇게 쓰이기 위해 생성된 이야기인 양 구성하는 것도 능력이라는 것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지도교수님께서 지적하신 것도 이 부분이었는데, 목차를 보시고는 내 논문에는 스토리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처음에 나는 학술적인 논문에 '스토리'가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싶었는데, 그것이 학술적인 논문이든 문학 작품이든 음악이든 스포츠든 하나의 장과 절이, 하나의 음절과 마디가, 하나의 움직임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감에 있어 자연스러운 흐름을 유지할 것.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기 위해서는 분명한 주제의식이 그 기반에 존재할 것. 하여, 내 주제의식은 서론에도, 본문의 1장에도, 2장에도, 3장에도, 결론에도 희미해지지 않고 생동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각 장을 구성하는 나의 문장들은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그 위에서 자유롭게 변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논문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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