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괜찮았다고요. 아 진짜로
개강 후 나와 입학 동기였던 J와 어쩌다 연락이 닿았다. 둘 다 이번에 졸업을 하며, 인터랙션 분반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졸전을 같이 하자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J는 당시 다른 인원들과 팀 빌딩 중이었고, 나는 혼자서 졸전을 진행해볼까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2주 정도 뒤 우연찮게 J의 팀빌딩은 무산되었고, 둘이 함께 교문을 걸어나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이었다. 문득. 정말 문득 '우리 같이 할래?'라는 말이 나왔다. 곧 둘 다 침묵했다. 졸전의 무게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학기 중 진행하는 가벼운 팀플이었다면 진작에 같이 했다. 그런데 1년 짜리, 졸업이 걸린 프로젝트라니. 잘해야 본전이었다. 서로 쿵짝이 잘 맞아 순항한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합도 안맞고 서로 실력도 따라주지 않는다면 엄청 싸우고 졸업도 힘들 것이다. 5년을 알고 지낸 친구를, 위험한 모험에 선뜻 초대할 수는 없었다. 성공하면 영혼의 투탑, 망하면 인생의 원수가 될 상황이었다.
J의 흡연을 옆에서 기다리며, 닥터 스트레인지마냥 미래의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 중이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J였다. '형, 그냥 하자'(나는 입학을 늦게 해서, J보다 형이다). 잠깐 하늘을 보고 대답했다.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프로젝트를 하며 우정이 흔들리더라도, 비록 힘들 수 있더라도. 혼자 졸전을 하면서 온 고생을 뒤집어 쓰느니, 처음 보는 사람과 팀원이 되느니, 그래도 5년을 알고 지낸 친구와 함께 하는 게 여러 모로 훨씬 나을 것이었다.
우리는 낄낄대며, 서로 잘 부탁한다고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1년짜리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한다.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주제 선정이다. 생각보다 빠르게,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어느 날 수업 전, 나는 J에게 보여줄 용도로 ppt를 만들었다(평소 이런 걸 좀 좋아한다). 주제 선정의 논리와, 그에 따른 주제 후보군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일반적으로 졸업 전시는 컨셉/비주얼에 초점을 맞춘다. 학생이 갖는 기술적 역량 한계와 동시에, 학생 때만 보여줄 수 있는 아이디어의 참신성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J의 성격과 역량을 고려했을 때, 우리는 실용적인 디자인을 해보는 걸 제안한다.
MR/XR이라는, 졸업전시 기술 조건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주제/문제는 반드시 XR/MR로써 해결되어야 하는 디자인이어야 한다. 다른 기술이나 미디어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유저가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NFT 거래를 주제로 삼는다면, '굳이 불편하게 VR 고글을 착용하고 거래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반문이 먼저 제기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XR/MR은 현실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가짜'이다. 만약 우리의 디자인이 지나친 몰입으로 인해 오히려 현실을 등한시하게 된다면, 기술의 오용일 것이다. XR은 어디까지나 수단으로써, 현실을 살아가는 유저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주제의 후보들은 다음과 같다. 교육/훈련/치료
이 셋은 현실에서 Hi-fi로 시도하기엔 비용이 크다. 실행-연습을 위해서는 몰입감과 효용성을 위해 유사도가 높은 세팅이 필요하다. 하지만 매번 높은 비용을 들여 세팅하고 시도할 수 없으니, 현실과 비슷한 유사성으로 높은 몰입감을 유발할 수 있는 가상현실을 이용해 위 업무의 적응도를 효과적으로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잠깐 다른 이야기 좀 하겠다.
이 아이디어는 어디서 왔냐면, 아이언맨이다. 무슨 소리냐고?
MCU의 영화 '시빌 워'에서는 극 중 초반에 토니 스타크가 MIT에서 강연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청년 시절 부모를 사고로 잃는다. 그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증강현실로 부모와의 마지막 만남을 재구성한다. 예토전생은 할 수 없으니, 가상 부모에게라도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하면 부정적 감정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 기술의 핵심이다.
아무튼, 나는 영화를 볼 당시 이 기술이 꽤 인상깊었고, 실제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렇게 기억 한 켠에 묻어두고 살았다. 그러다 졸업 전시의 기술 환경이 VR이라는 상황에서, 문득 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덕질은 유용하다라는 말이 새삼 와닿았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이걸 ppt로 정리해서 J에게만 보여줄 심산이었는데, 교수님이 갑자기 모든 팀이 나와서 각자 주제 선정 진행 상황에 대해 가볍게 공유해달라고 하셨다. 잠깐 당황했지만 어쨌든 나는 준비가 되어있는 상황이라, 나가서 어찌저찌 잘 설명을 드렸다. 평가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나름 잘 잡혀가는 주제를 보며, 시작이 꽤 괜찮음에 안도했다. 이렇게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얻어, 다음 주, 그리고 그 다음 주를 계속 열심히 해보자고 다짐했다.
그 땐 몰랐지. 우리에게 어떤 고난들이 닥칠 줄은.
다음화
https://brunch.co.kr/@suhwan1027/11
졸업 전시가 끝난 지 한참 지난 마당에, 과거의 일들을 적어내리는 이유는
1) 그 때의 일들과 기억,감정을 남기고 싶어서
2) 당시의 부족함을 돌아보며 반추하기 위해서
3) 못난 졸업생으로서, 졸전을 앞둔 미대생들에게 제발 니네는 이렇게 하지 마라...라는 걸 경고하고 싶어서
4) 잠 안오는 새벽에 옛 이야기들을 그냥 끄적이고 싶어서
5) 졸전 때 내가 사용했던 피그마 + 오큘러스 VR 기술 결합에 대한 디자인-테크 블로그를 쓰고 싶어서
이다. 사실 5번이 표면적 이유고, 4번이 진짜 이유인데, 그냥 손 가는대로 일단 쓰고 나중에 정리를 한 번 하겠다.
졸업전시를 앞둔 모든 미대생들 화이팅. 우리처럼만 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