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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라이어티삶 Dec 27. 2019

오감으로 경험하게 하라

고객을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새로운 감각을 열게 하라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들린 앤트러사이트라는 커피숍에서 정말 특이한 경험을 했다. 온 건물을 검게 칠해놓은 이곳은 건물에 들어가는 문을 찾기부터가 보통과 달랐다. 육중하고 거대한 검게 칠해진 문. 나무 뭉치를 거칠게 깎아 꽂아놓다시피 한 손잡이를 밀고 들어서면 그 안은 마치 건물이, 그 공간이 빛을 모두 흡수해 버리는 것처럼 검고 또 검다.


공간을 받치고 있는 굵은 콘크리트 기둥 몇 개 말고는 텅 빈 곳.

얼음처럼 투명하지만 커튼처럼 넓은 유리가 거대한 원두 로스터와 리빙룸을 나누고 있다. 당황스럽게 앉을 곳도 없는 1층. 그냥 공간에 걸터앉도록 만들어 놓은 넓고 낮은 자리가 있지만 누구도 그곳에 있지 않았다. 덩그러니 있는 카운터에서 무심하게 포터 와인을 주문하고 진열된 원두 백들을 봤다. 빛이 흡수되는 검은 벽에 놓여있는 하얀 원두 팩은 마치 검은 커피빈이 빛을 내는 듯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원두의 향과 맛을 설명하는 글보다 어디 소설에서 따온 문장들이 원두 팩에 프린팅 되어 있다. 자기들은 커피콩이지만,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커피콩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시간을 흘려보낼 곳을 찾으려 이층으로 오르는 길은 더 검다. 일층의 어둠에 눈이 적응하지 않았다면, 손을 벽에 짚어야 할 만큼 검은 복도를 지나 검은 계단을 오르면 아까보다 더 육중한 커다란 문이 있다. 힘껏 밀어서 공간으로 들어서면 비로소 보이는 백열등 빛과 그 빛을 둘러앉은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 모두 각기의 일에 몰두하고 있다.

높은 천장과 빛의 부재에 익숙해지고 나니, 공기에 녹아있는 음악이 비로소 들린다. 아마 일층에서도 있었겠지만, 눈이 어둠에 적응할 때까지 눈치 못 챘겠지. 정말 이렇게 검은 곳에서는 냄새와 소리에 민감해지게 된다. 포터 와인의 바닐라향은 글라스에 바닐라 꽃이 있는 것 같이 진하게 느껴지고, 나를 방해하지 않을 만큼 낮게 깔린 음악이 선명하게 들린다.


컴퓨터를 갖고 이곳에 왔지만, 이 글을 쓸 때야 돼서 열었다. 여태껏 노트에 펜을 꺼내 아무 생각이나 끄적이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내가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이곳에서 나는 내 생각을 알게 되었다.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만으로, 검은 계단을 오르는 것만으로 정말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곳에서 빛을 차단당하면서 더 열리게 된 귀와 코로 다른 공간에 와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된 나는 새로운 생각이 필요할 때 다시 이곳을 찾게 되겠지. 멀리 가지 않고도 다른 버전의 나를 끌어낼 수 있는 잘 짜인 경험으로 이 커피숍은 많은 고객을 만들게 된 것 같다.



앤트러싸이트 스케치: https://youtu.be/9IlUhFW4R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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