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만 보고 들어 채우기도 짧은 인생에...
생계형 직장인들에게 '혐혐'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개를 가둬놓고, 바닥에 전기를 흘리면 처음에 개는 깜짝 놀라 펄쩍펄쩍 뛴다. 비명을 지른다. 찌릿한 그 전기 자극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가 아무리 우리 안에서 날뛰어도 그 전기 자극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개는 포기 한다. 바닥에 전기가 흐르건 말건, 경련이 생기건 말건 그냥 피할 생각 자체를 안 한다. 포기한다.
어느덧 직장생활 10년 차에 그동안 그렇게 피하려고 했던 '혐'이라는 감정이 내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된 나는 그 실험견처럼 어느 순간 그런 '혐'의 자극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기억나지 않는다.
10년이라는 직장생활 동안에 어느 순간 내가 '혐'이라는 감정에 무반응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게 된 다음부터는 마음이 힘들어하지 않는다.
회사라는 조직은 학창 시절 때 보다 더 상대평가. 이 곳에서의 서열, 순위는 어쩌면 가족의 생계를 해할지도 모르는 무서운 것이다. 회사 생활이라는 것 역시 정해진 자리를 옆 사람과 뺐고 뺐는 그런 싸움. 때에 맞게 승진하지 않으면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이 사람에게는 저 사람을 깎아내리고, 어제의 말을 오늘 반대로 말하기를 망설이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거세당한 수소
누군가는 이런 반응(무반응)을 무기력하게 의욕이 꺾여버린, 마치 거세당한 수소처럼 보인다고 하기도 한다(물론 그들은 직접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흘린다). 의욕과 열정, 에너지가 넘치는 내가 '무기력해 보인다'는 말을 듣고 난 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나는 정말 무의욕한가?
나는 의욕이 넘친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혐'을 일으키는 자극에 더 이상 반응 않기 때문이라 결론을 내렸다. 100세에 마무리한다면 벌써 절반에 가까이 서 있는 내 남은 시간을 더 이상 '혐'으로 채우지 않기로, 생계를 위해 인생을 바치는 공간과 시간을 마음과 영혼을 갉아먹는 '혐'으로 채우지 않기로 다시 한번 결심했다.
매일 아침의 출근과 밤늦은 퇴근은 회사를 위한 것 이전에 나와 가족을 위한 것이다. 숭고한 그것을 위해 바치는 그 시간이 '혐'으로 오염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며 좋은 것만 보고, 맛있는 것을 즐기고, 매일 웃기에도 짧은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