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아름다운 첫눈이 꽃잎 흩날리듯 지천에 뿌려지고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으며 소복이 쌓이던 날 씩씩이는 한참 투병 중이었다. 겨울에 내리는 눈은 으레 매년 겨울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손님이고, 겨울의 끄트머리에는 이제 지겨우니 그만 좀 봤으면 좋겠다고 궁시렁거리겠지만 작년 12월의 첫눈은 내 생애 맞은 첫눈 역사상 유독 반가웠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날의 첫눈이 유달리 특별했던 이유는 씩씩이가 이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맞을 첫눈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을 예감하고 예측하다 거의 확실시되는 마지막으로 자각되는 순간, 평범한 일상으로 치부되던 소소한 일들이 더없이 소중하고 특별하게 의미부여 된다. 그래서 그날의 첫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애절했다.
세찬 눈발이 세상을 장식하자 씩씩이를 담요로 감싸 안아들고 한달음에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겨울의 한기를 잊은 채 씩씩이와 나는 한참을 서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겨울 풍경을 지켜보았다.
담요 안 따뜻한 온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녀석을 품에 꼭 안은 채 첫눈을 함께 볼 수 있음에, 이때까지 녀석이 살아 있음에, 겨울왕국으로 변한 아름다운 세상을 한쪽 눈으로 나마 볼 수 있음에 너무 감사했다.
그렇게 씩씩이와 맹 추위를 떨친 겨울을 함께 보낼 수 있어 감사했지만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나 보다.
다시 2024년 봄을 함께 맞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씩씩이는 환한 봄꽃을 다시 보지 못한 채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2024년 3월 24일, 아름다운 봄날에 아름다웠던 내 아들 씩씩에게
씩씩 아. 엄마가 사는 이곳은 드디어 개나리도 매화도 환하게 꽃을 피웠어.
이 봄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
오늘은 새롬이와 집 앞 초안산공원에 산책을 다녀왔어.
새롬이도 따뜻해진 날씨에 기분이 좋은지 제법 잘 걸었어.
공원으로 온 동네 강아지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산책을 많이 나왔더라고.
갑자기 생각난다.
지난겨울 베란다에서 온 세상이 하얘지는 기적의 마법을 부렸던 첫눈을 너와 함께 볼 수 있어서 엄마는 너무너무 행복했어. 그 겨울의 행복이 넘치도록 과했는지 아름다운 봄날을 너와 함께 맞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엄마의 간절한 기도는 봄의 시샘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나 봐.
엄마는 봄이 가장 좋아.
매서운 추위에 주눅 들어 잔뜩 웅크렸던 몸과 마음이 봄을 맞아 활짝 피는 꽃잎의 용기에 힘입어 덩달아 기지개 켤 수 있는 봄이 너무 좋아. 이렇게 화창하고 화사한 봄날 그렇게도 기다렸던 봄꽃들이 지천에 피어 너무 행복한데 엄마는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봄날인데 엄마 마음은 눈부시도록 시리구나.
너와 함께 이 아름다운 봄을 맞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도 틀림없이 따뜻해진 날씨에 잔뜩 신이 나 꼬리를 힘껏 쳐들고 강아지 살인 미소 장착한 채 동네방네 구석구석 행복 바이러스 내뿜으며 활보하며 다녔을 텐데 말이야.
지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미소가 지어진다.
사랑하는 씩씩 아.
엄마가 적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여태껏 슬프다고 표현할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인간의 언어로 표현이 가능한 정도의 슬픔이었나 봐.
그런데...
너와의 이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슬픔을 표현한 모든 단어와 문장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온전히 담아낼 수가 없을 거 같아. 이렇게 영혼이 갈라지는 듯한 깊은 농도의 슬픔을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씩씩 아.
그곳에서 엄마가 네 이름처럼 씩씩하게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엄마를 위해 기도해 줘.
분명 엄마가 우울해하고 슬퍼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걸 알기에 하루하루 마음을 다잡으며 일상을 살아내고 있어.
오늘은 고통스러웠던 긴 겨울을 견뎌내고 오래간만에 다시 맞은 봄날이 너무 아름다워서 네 생각이 더 날 수밖에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