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이에 대해 쓴 글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지만 문득문득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이 솟구치면 그냥 운다. 시간이 흘러도 마음속 씩씩이가 살았던 자리는 금방이라도 돌아올 주인이 있는 것처럼 여전히 비워져 있다. 이런 깊은 사랑을 경험하게 해 준 씩씩이에게 참 고맙다.
2024년 5월 9일
씩씩이가 떠난 지 오늘로 62일째다.
아직도 씩씩이가 떠나던 날 촬영해 놓은 동영상을 보지 못한다. 많이 아팠을 때 찍었던 사진들도 못 보고 있다.
나와 함께한 9년의 시간 중 방광암으로 투병했던 기간은 겨우 8개월에 불과함에도 아팠던 시기가 가장 최근기억이고 오로지 서로만 바라보았던 시기여서 인지 씩씩이에 대한 기억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씩씩이는 투병 기간을 제외하면 정말 행복하게 잘 지냈다.
인간은행복했던 기억보다 불행했던 기억을 먼저 소환하나 보다.
또 이미 소유한 것은 애초부터 내 것이었던 것 마냥 당연시하고, 가지지 못한 결핍에 더안달하며 삶의 가치를 낭비하는 등 불행을 더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다.
사실 투병 기간 내내 불행하고 힘들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의 시간 중 가장 많이 교감하고 사랑으로 빛났던 시기였다.
씩씩이와 함께하는 1분 1초가 아쉽고 너무 애틋했다. 출근해서 떨어져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살을 맞대며 어떻게 하면 엄마의 사랑을 더 전할 수 있을까만 수없이 고민했다. 주고 또 주어도 씩씩이를 향한 사랑의 샘은 마르지 않았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너무 사랑한다. 엄마가 너를 얼마큼 사랑하고 있는지 엄마조차도 그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단다. 엄마의 사랑을 네 마음 곳곳에 가득가득 담아 가렴. '
떠나는 순간까지 이 마음을 씩씩이에 전해 주었다.
요즘 씩씩이 와의 추억을 소환하는 방법이 있다.
첫째, 아직 씩씩이가 덮었던 이불과 담요를 세탁하지 않은 채 이불장에 넣어 두고 있다. 가끔씩 담요를 꺼내어 얼굴을 파묻고 씩씩이의 체취를 맡는다. 이미 증발해 버렸지도 모를 씩씩이 냄새를 깊은 호흡으로 찾아본다.
둘째, 씩씩이가 떠나기 몇 시간 전 화장하고 나면 앞으로 씩씩이를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씩씩이 꼬리 부분 털을 조금 잘라 두었다. 지금도 씩씩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털을 만지작거리면 녀석을 쓰다듬던 털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하다.
셋째, 씩씩이 사진 액자를 매일 아침 볼 수 있도록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다. 아침마다 화장하며 씩씩이 사진을 한동안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사진 속 씩씩이에 아침 인사를 건넨다.
넷째, 씩씩이와 함께 산책했던 동네 어귀를 거닐며 늘 앞서 신나게 걷던 녀석의 뒷모습을 그려본다. 씩씩이는 떠나기 3일 전까지도 최선을 다해 산책을 했다. 산책에 늘 진심이었던 녀석에게 삶의 의지를 보았고 내 옆에서 더 살아있어야 할 이유를 찾으며 이런 녀석을 안락사로 떠나보낼 수 없다고 마음을 먹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