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감각적으로 둔한데 예를 들어 남들이 다 냄새를 맡고도 남을 즈음에서야 뒤늦게 냄새를 인지한다거나 층간소음이 들려도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는데. 그전에 층간소음이 나는지 자각조차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라 내게 층간소음 이슈는 먼 나라 얘기다.
이런 둔함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의사소통 시 직접적인 언어표현보다 상대방의 표정, 시선처리 등의 신체 언어가 더 진실에 가까울 때가 많음에도 감각적 섬세함과 예민함이 떨어지다 보니 상대의 언행에만 의존해 의중을 파악하곤 했다. 그 결과 대화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 혼자 뒷북을 친다거나 종종 눈치 없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지금은 mbti 극 'F'인 눈치 빠른 공감형으로 거듭났지만 과거의 나는 극강의 눈치 없는 'T'였다.
타고나길 감각 수용체의 개수가 적은 탓인지 둔감한 감각 능력은 어쩔 수 없다 쳐도 태아 수준의 공감 능력을 그나마 발달시킬 수 있었던 계기는 딱 두 가지다.
첫째, 엄마가 될 준비도 능력도 안되었던 사람이 어쩌자고 대책 없이 엄마가 되었고 초예민 기질의 딸을 키우며 나의 둔함으로 인한 공감능력 부재가 딸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변화는 문제를 자각하는 순간 시작된다. 그렇게 딸과 건강하게 소통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부족한 공감능력을 조금씩 키워주었고, 척박한 감각능력을 하나둘 일깨워 주었다.
둘째는 강아지들을 키우면서부터다.
사람의 마음도 읽지 못하는 내가 강아지들의 마음을 어찌 읽을 수 있었겠나.
그래도 강아지들은 딸과 달리 반항하거나 바로바로 불만을 쏟아내지 않으니 딸만큼 어려운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강아지들은 딸과 다르게 엄마인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슬픈 진실을 마주하게 했다.
100세 시대에 동참한다는 전제하에 딸이나 나나 100년 동안 공존하다 그 이후 사라지겠지만 어쨌거나 확률적으로 딸은 나보다 오래 살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반려견들은 길면 15년 남짓이다.
15년이 지나면 녀석들을 죽을 때까지 가슴에만 묻어둬야 한다.
이 슬픈 진실을 마주한 이후부터 더 세심하게 녀석들을 살피고 돌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려견과 처음으로 이별을 경험하고 평생 잠만 자던 내 공감능력이 서서히 꿈틀대기 시작했다.
씩씩이를 입양하기 전 키웠던 강아지 '청아'가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때 가장 후회한 것은 평소 양질의 사료를 먹이지 못한 것과 다양한 간식을 먹이지 못한 것이었다. 청아가 아프기 시작하자 이 사실을 깨닫고 맛있는 각양각색의 간식을 주문했지만 청아는 그 간식을 다 먹어 보지도 못한 채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렇게 청아가 떠나고 씩씩이를 입양한 이후에는 좀 더 양질의 사료로 바꾸었고 건강한 수제간식도 직접 만드는 정성까지 발휘하기 시작했다.
녀석들을 키우며 '시간'의 흐름에 대해 더 많이 자각하게 된 점은 큰 수확이다.
시간의 흐름을 자각한 후에는 시간에 끌려다니기보다 주어진 시간을 미약하나마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살다 갈 내 반려견과의 시간은 주도할 수 있었다.
아마 인간이고 동물이고 영원히 산다면 시간의 소중함을 결코 느끼지 못할 것이다.
또 시간이 다하고, 인연이 다해 이별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내 곁에 머물 것이므로 대상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자 문소리를 들었는지 안방에서 자고 있던 새롬이가 번쩍 몸을 일으켜 힘겹게 엄마를 마중 나온다.
요새 새롬이는 디스크가 심해져 걷는 게 예전 같지 않다.
산책을 나가면 눈이 안 보여도 성큼성큼 직진만 하던 녀석이 이제는 몇 발작 걷다 뒤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길 무한 반복하는 빙글빙글 걷기만 하고 있다.
새롬이의 건강 변화로 그동안 없던 두 가지 행위가 일상 루틴에 추가되었다.
새롬이에게 아침저녁으로 처방된 디스크 약을 먹이고, 통증 감소를 위해 아침저녁 산책 후 5분 이상 새롬이 등에 원적외선 조사를 해주는 일이다.
쓸데없는 공상을 해보자면, 세상을 지배하는 자는 돈이 많은 자가 아니다.
단연코 세상을 지배하는 자는 시간을 지배하는 자일테고 어차피 시간을 지배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 가장 비슷하게 자신의 시간을 주도하는 자가 자신의 세상,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