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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현 Apr 11. 2024

반려견 안락사를 고민하는 분들에게

어제저녁 씩씩이와 산책을 나갔다가 동네에서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계신  한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아주머니는 씩씩이가 다가가자 리드줄을 당겨 산책 중이던 강아지를 바로 품에 안으셨다. 공교롭게도 아주머니의 강아지도 시츄여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아주머니의 강아지는 언뜻 봐도 작고 발랑 발랑한 모습이 아기 강아지였다.


요새는 시츄를 키우는 경우가 드물어 산책 중에 시츄를 만나면 견주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곤 한다. 어제도 그렇게 인사를 나누다 씩씩이의 투병 사실을 이야기하였고 아주머니도 어렵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주머니도 올 5월 17살 된 시츄를 안락사로 떠나보내셨다고 한다. 그 후 허전함을 못 이겨 아기 시츄를 또 입양하셨다고 했다.  안락사로 이별하게 된 강아지는 떠나기 3개월 전부터 치매로 인해 밤낮없이 하울링을 해서 이웃들의 민원과 항의가 심각했다고 했다. 진정제를 먹여도 소용이 없고, 거동도 불가해 사료를 녹여 주사기에 담아 입에 급여해 주었고 대소변도 배를 마사지한 후 눌러 줘야만 겨우 봤다고 한다.


어제저녁은 유독 바람이 많이 불었다. 겨울바람의 추위 때문인지 외투와 모자로 꽁꽁 싸맨 아주머니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얼굴은 매서운 겨울바람만큼이나 한기 어린 슬픔이 가득 서려있었다. 아직도 매일 떠나간 아기에게 편지를 쓰고 계시다는 말씀에 나는 더 이상 안락사에 관해 묻지 않았다. 나 역시 아픈 노견을 두 녀석이나 키우고 있어 생때같은 반려견의 안락사를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고통 속에 번뇌했을지 백분 이해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나도 요즘 주변에서 종종 안락사에 관한 고언을 듣는다.  아픈 아이들 돌보느라 고생하는 나를 봐서도, 또 질병으로 고통 속에 있는 반려견들을 위해서도 '안락사'라는 선택지도 있으니 고려해 보라는 조언이다. 나는 어렵게, 정말 아주 어렵게 안락사를 선택하신 분들의 뜻을 존중하고 또 이해한다.


죽음이 임박하면 사람이나 동물이나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한다. 또 잠, 음식, 배변활동 등 생명유지를 위한 필수 요소들도 서서히 중단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오롯이 지켜봐야 하는 보호자는 성큼 다가온 이별 앞에 무력감과 깊은 절망감을 감당해야 한다.


한마디로 생명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과정은 반려견과 주인 모두에게 고통의 시간이다. 견주에게는 흡사 자식을 앞서 보내야 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엄청난 상실을 아픔을 직면해야 한다.


요즘은 가족을 포함한 지인들의 삶의 마지막 과정을 시공간을 공유하며 함께 하지 못한다. 질병으로 쓰러지면 바로 응급실을 통해 병원에 입원하고, 병원에서 퇴원을 종용당하면 요양원으로, 요양원에서 상태가 더 악화되면 요양병원으로, 요양병원에서 삶을 마감하면 바로 장례식장으로 이동한다. 건강할 때 병원에 방문하는 것은 내 의지이지만, 의식을 잃고 병원에 방문하면 그때는 내 의지는 없고 우리나라 의료 체계 사이클로 입소하게 된다.


과거에는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접할 기회가 많았다. 대가족 제도 내에서 가족구성원이 돌아가며 임종을 앞둔 환자를 간호했고 환자는 가족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했다. 나도 어릴 적 동네 어른들이 돌아가셔서 상여 나가는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고 초상 치르는 집 즉, 초상집도 흔하게 봐 왔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광경을 전혀 볼일이 없다. 마치 죽음은 우리의 삶에 절대 등장해서는 안 되는 불청객이자 꽁꽁 숨겨둬야 할 음지의 의식이 된 듯하다. 우리 삶은 생로병사의 과정이 아닌  '생로병'의 과정으로 단축되었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도 자연스러운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출생의 과정은 산고의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모두가 축복한다. 반대로 죽음의 과정은 고통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죽음을 자각할 때  현재의 시간을 더 밀도 있게 살아가게 된다.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할 때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초집중하며 의미 없이 흘려보낸 그동안의 시간들이 반짝이는 금빛 시간들로 의미부여 되어 소비된다.        


또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나 반려견도 크고 작은 몸 상태의 기복은 있다. 생명은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수직하강하며 내달리지만은 않는다. 중간중간 컨디션이 좋을 때는 못 먹던 음식을 받아먹기도 하고, 힘들어하던 산책도 평소와 다름없이 잘 다녀 함께할 시간이 더 남았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게 한다.  이 시간을 통해 사람이라면 사랑했던 가족,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반려견이라면 주인과 마지막 교감을 나누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 시간은  신이 허락한  마지막 배려의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만약.... 고통의 시간을 줄여준다는 명목하에 안락사를 선택한다면  반려견과의 마지막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또 반려견을 떠나보내는 과정 중에 내가 배워야 할 인생의 의미도 있지만 반려견 또한 마지막 생의 과정을 끝까지 완수해야만 배울 수 있는 견생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안락사는 견주와 반려견 모두에게 그 기회를 빼앗는 의료 행위일지도 모른다.


나는 안락사의 윤리적, 법적 논쟁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다만 내가 키우는 두 녀석들의 안락사에 대한  결정 권한을 가진 입장에서만 말할 수 있다. 생명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라는 나의 가치관이 한몫했겠지만 현재 나는 안락사에 대해서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


끝까지 용기 있게 녀석들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고 싶다.


얼마 전 씩씩이가 통증 때문인지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던 때가 생각난다. 씩씩이는 새롬이와 달리 나를 핣아준적이 없다. 그런데 그날 밤은 내 두 눈을 지그시 응시하며 녀석을 쓰다듬는 내 팔을 정성스레 핣아주었다. 그날 녀석이 내게 전하고자 했던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만약 안락사를 했다면 그날의 애틋한 교감은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감동과 기쁨을 선물해 주는 녀석들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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