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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현 Apr 24. 2024

개고생했던 대학 시절 이야기 2

결핍이 내게 준 의미

고향집을 떠나 친척집을 전전하며 우여곡절 재수 생활 끝에 지방대학 간호학과에 추가 합격해 천신만고 끝에 22살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이제 고졸 경리사원이 아닌 대학생이 된 것이 꿈만 같았다. 등굣길 학교 입구에 들어설 때면 그동안 가난 때문에 제때 공부하지 못한 서러움까지 복받쳐 혼자 감격하곤 했다.


이런 나와 달리 과 친구들은 대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더 좋은 대학에 지원했다가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다니고 있다며 풀 죽어 이야기했다. 또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안 해 대충 성적에 맞추어 오게 되었다며 해맑은 표정으로 가볍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때 알았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어도  자리에 오기까지 거쳤던  삶의 경로는 모두 다르다는 것을ᆢ

친구들은 부모님의 지원으로 공부만 하면 는 환경에서 자라 '직선' 코스로 여기까지 왔다면, 나는 부모님의 지원 없이 혼자 힘으로 멀리 돌고 돌아 '곡선' 코스로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들 마음에 차지 않았던 대학이었지만 나는 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회사에 다니며 학원비를 벌어야 했고, 고향집을 떠나 낯선 도시로 와야 했고, 고등학교에서 3년간 배워야  교육 과정을 8개월 압축과정으로 배워야 했고, 불합격의 고배를 마신 후 가슴 졸인 끝에 추가 합격하는 곡선에 곡선을 더해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22살 대학 생활은 시작되었고 기쁨도 잠시   현실적인 난관에 부딪치며 지난한 곡선길로 다시 들어섰다.

당시 동생과 나는 함께 대학에 입학했고 엄마는 동생에게는 학비를 지원해 줄 수 있지만 내게는 장학금을 타서 등록금을 충당하라고 했다. 동생은 인문계고를 진학해 대학생이 되는 코스를 대비해 등록금을 모아 두었지만 나는 대학생이 될 줄 몰랐는지 내 등록금까지는 여력이 안된다고 했다.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해 월급을 몽땅 맡기자 매우 기뻐했었다. 그렇게 회사 다니다 적당한 남자 만나 시집이나 가라는 것이 엄마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엄마 말대로 그러리라 믿었던 딸이 퇴사하고 공부를 하겠다고 하자 낙심한 엄마는 내 머리채를 잡고 울고 불고 난리를 치셨다. 나는 엄마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기에 그러거나 말거나 내 갈 길을 가겠다고 했다.


그래도 막상 대학에 합격하자 엄마는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문제는 또 '돈'이었다. 첫 학기 등록금은 엄마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 후에는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던지 장학금을 못 받으면 휴학하고 돈을 벌던지 해서 알아서 졸업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내 대학생활은 낭만과는 아주 거리가 먼 '체험삶의 현장'이 되어 버렸다.


등록금도 용돈도 직접 해결해야 했기에 전쟁을 치르듯 치열하고 정신없이 바쁘게 보냈던 대학 시절이었다.


용돈을 벌기 위해 알바를 쉬지 못하고 학기 중에는 학교 앞 술집에서 설거지 알바, 학교 내 복사집 알바, 방학중에는 경리 알바 등을 하면서 보냈다.

 알바로 돈이 모이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내 대학생활 루틴은 이러했다.

6시에 기상해 아침을 먹은 후 부리나케 학교로 가서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공부를 하다 9시 수업을 들으러 강의실로 향하고 하루 수업이 모두 끝난 오후 3~4시에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와 공부를 한 후 밤 10시 스쿨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 대학생활이 마치 고3 수험생 같았다.


학교 도서관은 공부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여름에는 시원했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당시 언니, 동생과 함께 살던 자취방은 전세 600만 원 단칸방으로 푸세식 화장실에 여름에는 무지 더웠고 매미 크기 만한 바퀴벌레가 수시로 날아다녀 질겁하게 했다. 또 겨울에는 얼마나 추웠는지 난방용 기름보일러를 아무리 돌려도 방이 냉골이어서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바로 얼 정도였다. 강추위에는 방안이라도 손이 곱아서 연필을 잡기도 힘들었다.


어쩌다 전세 2천만 원 친구집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너무 좋아서 입이 떡 벌어졌던 기억이 있다.

방과 거실이 하나 된 원룸형이 이었는데 너무 깨끗하고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안에 있었다. 또 한 겨울임에도 참 따뜻했다. 내가 살던 집과 비교하자면 친구 집은 궁궐이었다.


어려서부터 붙어 다닌 가난 딱지가 익숙해서 인지 별다른 저항 없이 내 처지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래도 꿈은 절대 가난하지 않았기에 기죽을 것도 없었다.


가난은 오히려 목표에 대한 몰입과 근성. 포기하지 않는 지구력을 길러주었다.


여하튼 바깥 환경이나 다름없던 집보다 쾌적한 도서관에 늦은 밤까지 머물며 악착같이 공부했다. 이건 진실인데 너무 오랜 시간 의자에 앉아있어 엉덩이에 종기가 난적도 있었다.


당시 나에게 공부는 어렵게 획득한 대학생 신분을 유지하고 무사히 졸업하기 위한 절체절명의 생존 수단이었고 자존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꿈을 이루기 위해 매달려야만 하는 동아줄이었다.


중년이 되어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나를 성장시킨 것은 "결핍"이었다. 결핍이 꿈을 꾸도록 했고, 결핍을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이 꿈을 향해 달려갈 동력이 되어주었다.


결핍과 함께한 삶의 경험은 귀한 자산이 되었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곡선이 아닌 직선의 삶도 살아보고 싶다. 멀리 돌아가는 곡선의 결핍이 나를 성장시켰듯이,  직선의 여유가 주는 성장도  궁금하다. 이건 정말 모범답안이고 솔직히 말함 고난의 필수 코스인 고생이 이제 징글징글하다. 가난이 끌고 온 고난은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도 절대 위안이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요즘 청년들이 흔히 말하는 '이번 생은 망했다'는 푸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건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 삶을 허우적대며 살아봤기 때문이다.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다면 방법은 딱 하나다.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는 길 밖에 없다.


남과 비교하며 비관하고 지레 자포자기 하지 말자. 처해진 상황에서 최선의 의사결정을 통한 선택들로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채워나가길 응원한다.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으며 희망이란 단어를 가슴속에 품을 수 있기를 진심 담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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