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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현 May 27. 2024

눈이 안 보여도 거침없이 산책하는 강아지

새롬이의 시련은 시련이 아니다

새롬이의 하루는 대부분 잠을 잔다.

눈이 잘 보이던 2년 전까지만 해도 내 무릎 위나 배 위에 올라와 잠을 잤는데 지금은 불편하고 귀찮은지 저만치 따로 떨어져 잔다. 그런 녀석이 내심 서운해 무릎 위에 앉혀 놓으면 엉덩이가 뜨거워 못 참겠다는 듯 득달같이 내려가 버린다.


새롬이는 2년 전 급성후천성 망막변성 증후군(SARD)이라는 희귀 질환에 걸려 급작스레 실명했다.

어느 날 갑자기 밥그릇의 위치를 찾지 못하는 녀석이 이상해 유심히 관찰하니 거실에서 보행할때도 앞이 보이지 않는지 자꾸만 가구 모서리에 부딪쳤다. 부랴부랴 안과진료를 보고 나서야 원인도, 치료법도 밝혀진게 없다SARD라는 안과적 희귀 질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새롬이의 세상은 하루아침에 암흑의 정전상태로 전환되었다.


새롬이가 실명한 이후 안전을 위해 집안 바닥에 걸리적거리거나 부딪칠만한 물건은 두지 않는다. 그리고, 집안의 구조나 사물의 위치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소변 패드, 주방 앞 매트, 물통 등은 중요한 방향감각 지표가 됨으로 위치를 바꾸지 않는다.


명절에도 엄마집에 가자마자 집의 구조가 우리 집의 구조와 달라 당황할 녀석을 위해 가장 먼저 물통과 배변 패드의 위치부터 익히도록 했다. 새롬이는 익숙한 집을 떠나 며칠간 머물렀던 낯선 장소와 시간이 힘들었는지 심한 결막염으로 한동안 고생을 했다. 이미 실명한 녀석이라 더 이상 악화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막염으로 아파하는 녀석을 보니 마음이 무너졌다.


실명했어도 포도알처럼 반짝이는 큰 두 눈이 구조적으로 온전하게 자리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씩씩이는 방광암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너기 2달 전에 각막 염증이 악화되어 실명한 것도 모자라 오른쪽 눈을 아예 적출했었다. 남은 왼쪽 눈의 시력마저 상실하고 적출하게 될까 봐 내내 마음 졸이며 매일 상태를 살폈고 다행히 떠나는 날까지 한쪽 눈으로나마 엄마의 얼굴과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

새롬이도 실명했지만 안구 적출없이 외관으로나마 크고 예쁜 눈이 잘 보존되어 있어 너무 감사하다.


새롬이는 이제 엄마의 얼굴도,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나는 새롬이를 볼 수 있지만 새롬이는 나를 볼 수 없다.

하지만 엄마의 목소리와 손길을 통해, 퇴 했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후각과 청각을 통해 세상과 만날 수 있다.


새롬이는 실명했지만 그렇다고 산책 다니기를 멈춘 적은 없다. 

산책에 있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새롬이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아파트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면 지금은 내가 새롬이를 안아 집 앞 산책코스의 안전한 장소에 녀석을 데려다 준다는 점이다. 또 새롬이의 적극적 주도하에 동네방네 구석구석 자유롭게 산책 다녔다면 지금은 집 앞 꽃길(제목 사진) 직선거리만 짧게 왕복 산책한다. 거리상으로는 왕복 500~600M 정도로 짧지만 눈이 안 보이는 새롬이에게는 30분 이상이 소요되는 산책코스이다.


산책거리와 시간이 짦아진데는 실명의 영향도 크지만 척추 디스크로 뒷다리의 힘이 약해진 원인도 한몫했다. 또 이제 14살, 노견의 대열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레 산책 시간도 줄어들게 되었다.


실명 판정을 받고 집에 돌아온 날, 내 슬픔과 두려움, 걱정보다 새롬이의 마음이 더 걱정되었다.

사람도 갑자기 눈이 안 보이면 얼마나 놀라고 답답하고 무섭겠는가.

동물이라고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새롬이가 변화된 상황에 우울해하지 않도록 평상시 루틴대로 병원에 다녀온 날도 어김없이 저녁 산책을 나갔다.


새롬이는 갑자기 암흑이 되어버린 세상에 당황한 듯 가만히 서서 한참을 둘레둘레 거렸다. 

나는 한동안 서있다가 몇 발짝 걷다가 이내 멈춰 또 한참을 서있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는 새롬이가 조금씩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친숙했던 바깥공기를 맡으며 엄마를 온전히 믿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산책시간을 늘려갔다.


지금 새롬이는 엄마의 손에 쥐어진 리드줄이 보내는 몸의 감각과 후각에 의지해 매일 30분 이상 거침없이 산책을 다닌다. 

꽃나무에 묻은 친구들의 배변 냄새를 맡기 위해 다가갈 때는 행여 나무 가지에 눈을 찔리지 않는지 잘 살펴줘야 한다. 또 담벼락이나 전봇대 등 길가에 놓인 물체에 얼굴(특히 눈)이 부딪칠 위험이 있다면 살짝 리드줄을 당겨 위험하니 천천히 가도록, 또는 방향을 전환하도록 새롬이에게 신호를 준다. 그럼 녀석은 엄마의 신호를 알아듣고 가던 길을 멈추어 방향을 튼다. 새롬이와 나는 함께한 시간만큼 두터운 신뢰에 기반해 쿵짝이 잘 맞는 산책 파트너가 되었다.


올해 들어 부쩍 뒷다리에 힘이 없어진 새롬이와 언제까지 산책을 다닐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씩씩이에게도 산책이 삶의 의지를 드러내는 지표였듯이 새롬이 역시 죽기 직전까지 꼭 해야 할 삶의 필수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청아도, 씩씩이도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유일하게 남은 우리 집 강아지 새롬이.

새롬이가 앞 발을 뗄 수 있는 힘이 남아있는 날까지 산책을 다닐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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