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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현 Jun 28. 2024

타령 중에 최고는 '사랑 타령'이다.

엄마와 나, 그리고 사랑의 연결고리

사람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잊지 않으려 되새기고 다짐하는 화두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게 바로 '사랑'이다.


따뜻한 사랑의 말 한마디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릴 수도, 사랑이 담기지 않은 차가운 말 한마디로 봉합될 수 없는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낼 수 도 있다. 사랑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양 극단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은 칠흑 같은 어둠 속 한줄기 빛과 같다.

사방이 깜깜한 어둠속이라도 반딧불이의 작은 불빛이라도 존재한다면 우리는 희망을 발견하고 두려움은 금세 가라앉고 평안을 찾게 된다.


사랑이 담긴 말과 행동은 희망과 기쁨으로 변환되어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준다.

사랑의 부재 속에 자랐다면 한겨울 한파에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속에서 느껴봤을 안온함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 한여름 폭염에도 마음속은 매서운 찬바람이 분다. 또 평생 사랑을 갈구하느라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소비한다. 어떤 경우는 자신에게 수혈되어야 할 가치가 '사랑'인 줄 모르고 자꾸 엉뚱한 가치를 채우려 들기도 한다. 그 엉뚱함은 다양한 곳을 향하는데 때로는 성공과 돈에, 때로는 음식에 집착하거나 외모, 건강에 집착하며 사랑의 자리를 대신해 채우려 든다. 하지만 휘발유 차에 경유를 채우면 차가 바로 고장나듯이 우리도 겉보기에 반짝이며 빛나 보이는것에 이끌려 그것을 소유하면 나를 빛나게 해줄거라 착각하며 사랑의 자리에 끼워넣어봐도 희안하게 '사랑'만은 어떤것도 대신할 수가 없다. 이렇듯 사랑은 정말 대체 불가한 가치다.


사실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사랑을 받길 원하기 때문에 사랑을 달라고 요구하면 자칫 철부지로 취급 되기 쉽다. 사랑을 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상대에게 사랑을 줄 때 어느 순간 사랑이 다시 내게 돌아오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또 사랑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재화가 아니다. 그래서 부모나 가족에게 받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매우 중요한다.


사랑받지 못한 채 성인이 되었다면 몸은 성숙한 성인의 모습으로 변모했더라도 마음속 찬바람은 여전히 가실 줄 모른다. 사계절 내내 찬바람만 지속되면 우리 마음은 촉촉한 물기하나 없이 바삭 말라 갈라지고 결국 부서져버린다. 건조해진 내면은 감동하거나 감탄하는 정서를 휘발시켜 계절의 변화도,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마주하고도 어떠한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는다. 내내 무감각한 태도로 일관한다.


사람은 눈코입 붙어 있듯 누구나 내면에 사랑의 그릇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랑의 그릇은 오직 사랑만이 연료가 된다.


어떤 사람은 마음속 사랑의 그릇에 크기가 작아 조금만 사랑을 부어줘도 포만감을 느껴 결핍을 느끼지 못한다. 그릇의 크기가 작은 이유는 타고나길 작을 수도 있지만, 애초 사랑의 결핍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사랑의 그릇에 집착한 적이 없어 그릇이 더 커질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집착하면 그 대상은 자꾸만 눈덩이 불리듯 부피를 키우기 마련이다. 두려움에 집착하면 두려움이 더 커지듯이..


그런 사람은 공복감을 모른다. 늘 배가 부르니 타인의 결핍이 잘 보이지 않아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데 집중하거나 때로는 자기 배가 부르니 여유가 생겨 다른 사람의 사랑의 그릇은 어떤 상태인지, 얼마나 채워졌는지 살피며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과 돌봄을 제공할 수도 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릇의 깊이가 마치 우물과 같아 훨씬 더 많은 양의 사랑을 채워야 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우물의 면적마저 넓다면 그 바닥을 채우는데만 꽤 시간이 걸린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그릇을 채우지 못했기에 마음의 여유가 없어 타인과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의 그릇을 채우기에만 급급하다. 아이들의 경우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에 긍정적인 행동이 아닌 부정적 행동을 선택하기도 한다. 문제 행동으로 치부하기 쉽지만 이런 경우 사랑의 공복을 견디지 못해 sos를 보내는 경우일 수 있다.


사랑만을 연료로 하는 전용 그릇은 사람마다 크기와 깊이가 각각 다른데 그것을 결정하는 요인은 타고난 기질도 있지만 내가 선택하지 않은, 태어났더니 이미 주어진 주변 환경적 요인도 크다.


우리는 서로 상대의 사랑의 그릇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서로 그릇의 상태를 체크하고 수시로 채워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사랑을 채워줄 만한 주변에 인적, 물적 기반이 없다면 내가 직접 나 자신의 구원자 되어 내 사랑의 그릇에 사랑을 가득 부어주어야 한다. 가끔씩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좋아하는 행위를 하는 것, 내 경우 자연을 볼 수 있는 한적한 카페를 좋아한다. 그런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 마시며 책을 읽거나 멍을 때리거나 보고 싶은 친구들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하기도 하는데 그 시간을 통해 내 사랑의 그릇은 든든하게 채워진다.


사랑의 그릇이 오랜 시간 텅텅 비어 마음이 바싹 말라버렸다면 우리는 방황하며 그릇의 크기와 깊이를 점점 키워나가고 그럴수록 더 많은 갈증을 느끼게 된다. 더 커진 사랑의 그릇은 더 큰 결핍을 만들어 낸다.


나는 어린 시절 엄마 외의 어른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해 대부분의 시간을 그릇을 비워둔 채 살아왔다.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몰랐고 설상가상 엄마 역시 방황했기에 우리들에게 넉넉한 사랑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마의 사랑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은 없었다.

엄마가 우리를 버리고 가버릴까 걱정했던 적도 없다.

엄마는 방황했지만 늘 우리들 옆에 있었고 세심하진 않지만 큰 사랑으로 자식들을 품어 주었다.


엄마를 원망했던 마음도 사실 엄마에게 사랑받은 경험이 선행되었기에 사랑을 마음껏 채워주지 않는 엄마를 오매불망 바라보며 키웠던 감정이었으리라.


그런 엄마의 사랑 덕분인지, 또 내가 경험한 사랑의 결손이 남긴 상처 때문인지 나는 누구보다 사랑의 힘을 알고 있다. 그래서 지방에 사는 조카들이 어릴 때는 방학마다 서울로 불러 딸과 함께 일주일 놀이투어를 시켜주었다. 맛있는 음식도 해주고 체험 활동도 데려가고 놀이동산도 가고 정말 신나게 놀아주었다. 지금은 조카들이 동생 딸만 제외하고 모두 성인이 되었다. 지금도 큰 조카는 이모와 방학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을 기억한다. 나는 받아보지 못했지만 조카들은 부모의 사랑은 기본이고 부모 외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경험을 하길 바랐다.


내 안의 사랑이 완성되면 그 사랑은 내 안에만 머물지 않고 나를 넘어 타인을 향한다.

사랑은 역동적이고 확장성을 가진 특성이 있어 그대로 간직만 하기는 힘든 속성이 있다. 또 침습성도 강해 상대의 마음에 잘 스민다.


살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결심하는 순간이 있다.

사랑은 결심하는 순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엄마에게 사랑을 결심한 후 브런치에 '엄마를 사랑하고 싶은 딸의 이야기'라는 이 연재글을 쓰기 시작했다.

연재글 역시 사랑이 가진 역동성과 확장성이 만든 결과물이다.

이러니 여기저기 많은 사람들이 사랑 타령 하는것도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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