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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하다 Mar 30. 2024

독자가 작품과 더 깊이
상호작용하길 바랐던 작가

나탈리 사로트와 누보로망

- 그럼 너 그걸 정말 할 거니?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것' 말이야... 이 표현은 너를 정말 난처하게 하지. 너는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이것이 꼭 들어맞는 유일한 표현이라는 점을 인정해. 너는 '추억을 회상하는 것'을 원해. 돌려 말할 것 없어. 바로 그거야.

- 그래. 나로서는 어쩔 수 없어. 그러고 싶어. 왠지 모르겠지만...

- 그건 아마도... 그건 혹시... 이따금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너의 기력이 쇠진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 아니, 그렇지 않아...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아...

- 하지만 네가 하고 싶어 하는 것... 추억을 회상하는 것... 그 건 혹시...


나탈리 사로트의 《어린 시절》 시작 부분...






시시콜콜한 소설의 시작, 앞뒤 이어지지 않는 문장들, 혼잣말 같은 문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날것처럼 끄적여 놓은 것 같은 문장들, 이는 한 소설의 첫 페이지를 옮겨 놓은 부분이다.


우리는 문학책을 펼쳐보는 순간 다양한 기대를 한다. 작품을 꿰뚫는 첫 문장, 작품 속 세상, 입체적인 주인공사건과 위기, 그리고 그것들을 겪어내는 과정까지 우리는 어찌 보면 클리셰 같은 기대에 얼마나 많이 부응했는지로 작품을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러한 클리셰에 반기를 드는 운동이 나타났다. 누보 로망Nouveau Roman, 신소설운동이라고 불리었던 이 움직임은 전통적인 서사 방식에서 벗어나 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는 시도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이 새로운 시도에 앞장서서 문학의 지평을 넓힌 혁신적인 작가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을 꼽을 수 있다. 그녀의 작품은 인간 의식의 복잡한 흐름과 내면의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동시에 문학이 담아낼 수 있는 인간 경험의 깊이와 다양성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했다.




나탈리 사로트




사로트는 1900년 러시아의 이반노보에서 태어난 작가이다. 그녀는 러시아와 프랑스, 스위스를 오가며 다양한 언어와 문화에 자연스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또한, 그녀의 가족은 문학과 예술을 매우 중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어린 사로트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문학과 예술에 노출되었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일기와 편지, 짧은 글의 형식으로 문학에 대한 열망을 내보였다. 그녀는 특히 마르셀 프루스트와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 매료되었으며, 이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흐름과 내면적 탐구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추후 그녀가 신소설 운동에 기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동시에 문학적 실험과 혁신의 기초가 되는 단초 역할을 했다.


많은 이들은 그녀의 문학적 소양이 어린 시절의 환경과 교육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한다. 다양한 문화권의 다양한 문학을 경험했던 어린 시절이 후에 현대 문학의 한계를 넓히는 작품을 창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녀의 성장 환경은 문학적 깊이와 복잡성을 탐구하도록 이끌었으며, 더 나아가 그녀의 작품 속에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섬세하게 포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나탈리 사로트의 《트로피즘》




전통을 거부하다


실제로 그녀의 문학적 성과는 소설의 전통적인 서사 방식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녀의 대표작 《트로피즘Tropismes》은 전통적인 소설의 구조 대신 내면의 심리적 흐름을 기술하는 혁신적인 방법을 취했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이 작품은 누보 로망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 작품을 시작으로 누보 로망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프랑스를 문학을 대표하는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녀의 데뷔작이기도 했던 이 작품은 1939년 처음 출간된 이후로, 누보 로망의 기초를 마련한 작품으로 평가받아 왔다. 이 작품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무의식적인 내면적 충동이나 반응, 즉 '트로피즘tropismes' — 한글로 '반사 운동'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 을 탐구하는 짧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로트는 이러한 내면적 충동이 우리의 행동과 반응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이를 작품의 중심에 두고 그녀의 내면적 흐름을 작품으로 엮어 낸 것이다.


24개의 짧은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인간 의식의 미묘한 변화와 감정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해 내고 있다. 그녀는 일상적인 순간과 특정 상황에서 감지되는 그녀 자신 내면의 움직임을 최대한 정제 없이 드러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문자적 의미나 명확한 플롯보다는 내면적 변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녀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심리변화, 인상과 기억 등 기존 문학적 서술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부분들을 작품으로 엮었다. 이러한 스타일은 추후 누보 로망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프랑스의 누보 로망Nouveau Roman

프랑스의 누보 로망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발달한 문학적 현상으로,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소설의 형태와 기법을 탐구한 것을 말한다. 이 운동은 특히 프랑스에서 활발했으며, 알랭 로브-그리예, 나탈리 사로트, 미셸 뷔토르 등 여러 작가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누보 로망의 작가들은 전통적인 플롯, 명확한 주제, 일관된 시점, 전지적 서술자와 같은 전통적인 소설의 요소들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신 그들은 시간의 비선형적 구조, 내부 모노로그, 서술자의 불안정성, 인식의 흐름, 객체와 환경에 대한 세밀한 묘사 등을 통해 인간의 의식과 현실의 복잡성을 탐구했다.

신소설은 문학에서의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재고하고, 독자가 텍스트와 상호작용하면서 의미를 생성하는 방식에 더 많은 역할을 부여하려는 하나의 시도였다. 이러한 접근은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현대 비평 이론에 영향을 받았으며,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누보 로망은 단순히 소설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문학이 어떻게 현실을 재현하고, 독자와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 운동을 통해 나타난 작품들은 독특한 서술 방식과 실험적인 기법으로 인해 문학의 가능성을 확장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탈리 사로트 《의심의 시대L'Ère du soupçon》




그녀의 문학적 여정에서 《의심의 시대L'Ère du soupçon》는 그녀의 이론적 사고와 문학 비평에 대한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1956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일련의 에세이 모음집 형식을 취한다. 작품은 당시 문학의 주요 경향과 문학 이론에 대한 나탈리 사로트의 심도 있는 성찰의 결과를 담고 있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소설 형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함과 동시에 누보 로망의 핵심 이념을 더욱 명확히 했다.




문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접근 방식


사로트는 전통적인 소설의 구성 요소 — 명확한 줄거리, 고정된 캐릭터, 전지적 작가의 시점 — 가 현대 독자들에게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이러한 요소들이 인위적이고 구시대적인 구속으로 작용하고 있고, 또한 작가와 독자 사이의 진정한 의사소통을 방해한다고 보았다. 대신, 그녀는 소설이 인간 의식의 복잡한 흐름과 미묘한 심리적 변화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자신의 시대를 '의심의 시대'로 명명했다. 이는 독자들이 전통적인 서사 기법과 단순화된 인물 묘사에 대해 점점 더 회의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변화는 독자들이 소설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더 깊은 이해와 복잡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녀는 소설이 이러한 새로운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인간 경험의 진정한 본질을 포착하는 데 필요한 형식적 실험과 내용적 깊이를 더욱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문학 작품과 독자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작가가 독자에게 의미를 강요하기보다는, 독자 스스로가 작품 속에서 의미를 탐색하고 해석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독자를 더 적극적인 해석자로 만들며, 동시에 작품의 다층적인 의미와 복잡성을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나탈리 사로트의 《어린시절》




한 때, 유행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누보 로망의 흐름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70년대를 시작으로 그 관심은 점점 식어갔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 《어린시절Enfance》은 사로트의 문학 경력에서 눈에 띄는 독특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1983년에 출간된 이 자서전적 소설은 사로트의 어린 시절을 중심으로 한 회고록으로 그녀가 태어나서 청소년기를 거치는 동안 겪은 경험과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63개의 짧은 글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그녀의 기억 속에서 중요한 순간이나 경험을 떠올리면서, 그 순간이 그녀의 성장 과정과 자아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녀는 이 소설을 통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상기시키면서, 그 시기 자신의 순수함, 두려움, 그리고 깨달음의 순간들을 섬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미 글의  서두에서 잠깐 보았듯이 작품은 작가 자신과의 대화라는 다소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녀는 이러한 서술 방식을 통해 기억의 신뢰성과 그것이 현재의 자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기억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동시에 과거의 경험이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심도 있게 조명해 냈다.


특히 사로트의 가족 관계, 특히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사로트는 그녀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 어린 시절의 사랑, 갈등, 그리고 이해의 순간들을 섬세하게 이야기한다. 이러한 개인적인 관계가 그녀의 성격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그녀의 누보로망적 기법은 이번 작품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녀는 전통적인 자서전의 형식을 넘어서, 독특한 언어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서술 방식을 통해 어린 시절의 복잡한 감정과 심리적 상태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 대신 어린 시절의 파편적인 순간들의 기억을 통해 인간 경험의 보편적인 측면을 탐구하려는 시도로 여겨진다. 이러한 그녀의 시도는 언어가 기억을 재현하고, 또 해석하는 방식이자 도구로 사용된다는 그녀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나탈리 사로트




그녀의 문학적 유산은 현대 문학에서 심오한 영향을 남겼다. 그녀의 작품과 이론은 누보 로망의 핵심을 이루었으며, 전통적인 소설 형식에 대한 도전과 혁신을 통해 문학의 한계를 다시 한번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로트는 문학에서의 내면적 탐구와 의식의 흐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 심리의 미묘한 뉘앙스와 복잡성을 포착하는 독특한 방식의 서술 기법을 개발해 낸 것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전통적인 플롯과 캐릭터 개발에 의존하지 않는 대신, 인간 의식의 미세한 움직임과 '트로피즘'이라고 명명한 무의식적인 충동을 탐구함으로써, 문학적 형식과 내용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녀는 독자가 작품과 더 깊이 상호작용하고, 다양한 해석을 탐색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문학의 새로운 역할과 가능성을 제시했다.


비록 그녀의 작품을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는 없지만, 그녀의 혁신적인 접근 방식과 문학적 실험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그녀의 작품은 개인의 내면세계와 의식의 복잡한 표현을 모색하는 작가들에게 중요한 참조점으로 남아 있고, 문학이 인간 경험의 깊이와 복잡성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심리적 묘사를 따라가는 실험적인 서술 방식을 탐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문학을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로 소비한다는 측면에서는 다소 어긋나는 부분이 있지만, 문학을 통해 작가와 독자가 소통하고, 또 작가의 내면적 심리와 변화를 더 깊이 이해하는 수단으로써 본다면 그녀의 작품들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가 다양한 분야에서 더욱 활발하게 시도되었으면 한다. 그녀의 소설로 시작했으니 그녀의 소설로 끝






“가서 자거라, 걱정 말고...” 그가 나에게 말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인생에 아무것도 그럴 가치가 없단다... 알게 될 거야, 인생에선, 조만간, 모든 게 해결된단다...”

그 순간, 그리고 영원히, 겉으로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아무것도 끊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끈이 우리를 서로에게 묶어놓았다... 아버지가 느꼈던 게 뭔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나이에, 아홉 살이 채 못 되었어도, 그 이후 여러 해에 걸쳐 조금씩 밝혀진 모든 것을 단번에, 한꺼번에 알아차렸다고 확신한다... 아버지, 어머니, 베라와 나의 모든 관계들,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들은 거기에 감겨 있던 것이 펼쳐진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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