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주는 아픔을 마주 하는 용기에 대하여,
이별 후에, 이별 조리원.
출산 후 산후조리를 제때 제대로 하지 못하면 몸이 만신창이가 되듯이,
이별 후 이별 조리를 제때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다.
이별 후에,
다가 오는 모든 고통들을 마주하기 싫었다.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마주하는 방법을 몰랐다.
어떠한 핑계를 대서라도 이별 후에 난 제대로 조리를 하지 못했다.
용기 내어 그 상처를 들어다 보아야 했다.
용기 내어 그 상처를 곱씹어 보아야 했다.
용기 내어 그 상처를 받은 이유를 마주해야 했다.
들어다 보지 않고 울지 않으면 되는 줄 알았다.
상처를 곱씹어 보지 않고 많이 웃으면 되는 줄 알았다.
상처를 받은 이유에는 나의 잘못은 일절 없으며,
나 같은 건 다시는 못 만날 것 이라며 올바르지 못한 위로를 하며
더 좋은 사람을 찾으러 다니면 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가슴 한 구석이 뻥 빈 것 같은 괜찮은 시간들을 보냈다.
정말 괜찮았다.
친구들에게 실컷 욕을 하면서
요즘엔 이렇게 지낸다며
웃으며 이야기 하면서
그랬다. 그렇게 지내면 되는 줄 알았다.
제대로 조리하지 못한 텅 빈 가슴에 계속해서 많은 것들을 채워 넣으려고 노력했다.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고,
나에게 남은 상처를 치료하지 못한 채의 만남은 다른 이에게도 모난 상처를 주고 있었다.
그랬다. 건강하지 못한 만남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아물지 않은 상태라도 괜찮은 누군가가 오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것은 정말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가장 쉬운 응급처치를 찾았었다. 시간을 가지고 노력을 하며 치유를 했었어야 했다.
병의 원인을 생각해봐야 했고,
나의 행실을 생각해봐야 했고,
이렇게 곪기까지 너의 책임이 아닌 나의 책임도 담담히 물어 봐야 했고,
너만의 잘못이 아닌 나의 잘못도 시인하고 인정해야 했으며,
그런 나를 진심으로 안아줘야 했으며,
그런 아픈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줘야 했다.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지나가는 연고를 잡아다가 바르고 덧나고
다시 다른 걸 바르고 덧나고
그 허망한 기분과 아픔을 가장 나약하고 쉬운 방법으로 치료하려고 했었다.
그 누구도 나의 상처를 나를 감히 치유해 줄 수는 없었다.
나 자신도 모르는 나를,
어찌 감히 남에게 의지했던 걸까?
이별이 주는 아픔을 용기 있게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만,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이제 용기 내어 받아들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