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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Nov 04. 2023

어느 학교의 얄팍한 벽에 담긴
두툼한 가치들에 대해서

건축에 대한 사설

편집자: 세라 / 운영자: 가소로 / 디자이너: 하라


안녕하세요, 서울 건축 리뷰 운영자입니다. 원래는 다섯번째 리뷰에 대한 예고글을 썼어야 하지만 오늘 꼭 써보고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외국의 건물이라 이 매거진 성격에 맞진 않지만 건축에 대한 보통의 얘기를 해보는것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외국에 이렇게 좋은 건물이 있다네 부럽다, 우린 뭐하나 이런류의 얘기말고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 "건축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하는 이야기 말이지요. 시작해보겠습니다. 


독일 에센이라는 도시에는 졸버린(Zollverein school) 경영/디자인 스쿨이 있습니다. 수업을 통해서 처음 들었을때는 도시도 학교도 무척 생소한 이름이었습니다. 알고보니 졸버린은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탄광촌의 이름이었습니다. 석탄을 캐는 탄광이니까 지금은 대부분 문을 닫은지 오래고 19, 20세기 경에 활발했던 산업도시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전후 경제개발계획이 한창일때, 외화벌이를 위해 대규모로 수출했다는 독일 파견 광부분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졸버린 탄광으로 간 분들도 많았을겁니다. 


창문을 별처럼 흩뿌려놓은 정육면체 건물

그런데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서 탄광촌은 보존해야할 문화유산 지구가 됐고, 또 그 근처엔 학교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학교는 가로 세로 35미터에 5층규모로 세워진 나름 아담한 건물입니다. 그것도 정육면체 모양에다 온 사방이 회색빛 노출 콘크리트로 만들어져서 그다지 볼것도 없습니다. 다만 네모난 창문이 하늘에 흩부려진 별처럼 동서남북 네 면에 각기 다른식으로 배치되서 그게 볼만하다면 볼만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버린 스쿨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습니다. 좋은 건축이 뭐다, 하고 정의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건축이 이런 것까지 할 수 있었다니! - 하는식의 얘기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학교 아래 땅 얘길 먼저 꺼내보겠습니다. 졸버린 스쿨의 지반 아래에는 30도 정도의 적당히 따땃-한 온도의 물이 오래전부터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이 동네에는 석탄을 캐는 탄광이 또 지하에 있다보니 탄광에 물이 흘러들어 광부들의 목숨을 위협할 우려가 있었다고 합니다. 광부 노동자분들이 그런 사고를 당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죠. 그래서 이 지하 온수를 펌프로 끌어올려 수량을 적절한 수준으로 조절해왔고, 지금까지도 아주 소규모로 유지되는 탄광을 위해서 조절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안전을 위해 물을 끌어올리는건 그렇다 쳐도 퍼올린 물은 어디에다 쓸까요? 이 지하 온수가 졸버린 스쿨 건물 디자인에 아주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건축물은 주변에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치고 외벽 두께가 얇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약 30센치미터인데, 언뜻 들으면 뭐 종잇장처럼 얇지도 않은데 뭐가 얇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5층짜리 건물에다 연평균 기온이 10도가 되지않는 추운날씨를 고려하면 벽이 꽤 두툼해야 합니다. 독일같은 나라는 특히 환경 친화적 에너지 사용을 위한 단열성 등등에 대한 제한사항이 많습니다. 그 모든 요건을 충족시키려면 50센치에 육박하는 콘크리트 벽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어진 건물의 벽 두께는 그 절반가량인 30센치에 불과한데, 이게 지하 온수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이 건물의 콘크리트 벽 내부에는 끌어올린 지하수를 순환시키는 관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이왕 퍼올린 지하 온수 이렇게 재활용 하는거죠. 머리 잘썼네 하고 넘길수도 있지만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아주 문학적인 아름다움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 재활용이라는 합리적인 솔루션의 이면에 또 다른 두가지 중요한 가치도 함께 성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번째는 역사적 유산의 보존이고, 두번째는 모더니즘 건축이 추구하는 '비물질성'의 미학입니다. 

콘크리트 외벽 속의 구불구불 온수관

우선,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탄광지구와 지하수로 시설을 그대로 보전하기만 했다면 그저 역사적인 의의를 가진 건물로 그쳤을 겁니다. 하지만 과거의 수로 시설을 현대적인 친환경적 목적을 성취하는데 활용함으로써 뭔가 역설적인 효과가 발생합니다. 환경 파괴의 상징과도 같은 탄광의 유산이 유지되면서도 이제는 친환경적 에너지 활용을 위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건물을 더더욱 좋아하는 이유는, 이 첫번째 가치가 두번째 가치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지하 온수를 활용해 외벽 두께를 줄였다는 사실은 곧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들(SANAA)이 추구하는 모더니즘 건축의 미학을 성취에도 도움을 줍니다. 



모더니즘은 가능한한 물질성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조로 볼 수 있습니다. 모더니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번쩍거리는 투명한 유리건물을 봐도, 또한 지상 공간을 필로티로 붕 띄워놓은 구조를 봐도 그런 비물질성을 향한 추구가 드러납니다. 육중한 콘크리트의 두께를 줄이는 것 역시, 크게보면 물질성을 어느정도 증발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물질성이라는건 바꿔말하면 물질로 가득한 현실과는 선을 긋는 방향이라 그 동떨어진 성격에 대한 많은 비판을 받아왔고 여전히 그런 비판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 건물이 성취하는 비물질성은, 오히려 현실적인 맥락에 깊이 뿌리를 내림으로써 가능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상충하는 역설적인 가치들이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건물입니다. 역사를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놓치지 않았고, 비현실적 아름다움을 쫓으면서도 현실적 맥락에 더없이 충실한 디자인입니다. 아니, 오히려 역사를 보존함으로써 새로운 환경적 가치를 성취했고, 현실적 맥락에 충실함으로써 현실과 동떨어진 비물질성의 미학에 다가갔다고 해야겠습니다. 


수업을 통해 건물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전까진 네모 반듯한 지루한 건물인줄만 알았지, 이런 다채로운 이면이 있을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많은 고민과 사회상과, 역사와, 미학적 추구와, 기술들이 담겨있는 공간에서 공부한다고 뭐 성적이 엄청 오르진 않을겁니다. 하지만 성적 그 이상의, 두자리 숫자만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건 아주 자연스럽게, 공기를 통해서 알수 있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간에 담기는 관점이 풍요로울수록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삶도 풍요로워질 확률이 높다 - 그렇게 주장하며 이번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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