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차다. 일주일중 하루 쉬는 토요일에 학교에 나와 있다. 하지만 작업을 하러 나온건 아니다. 마음을 먹기 위해서 나왔다. 애초에는 작업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햇볕을 쬐고 운동을 하고 성당을 갔다가 학교에 오는길에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이미 시작도 하기전에 지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무슨 병법서였나, 아니면 스포츠 팀 감독의 말이었나, '이겨놓고 싸운다'거나 '너희는 시작도 하기전에 이미 졌다'거나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 이해가 된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도 샛길로 빠질 여유가 있는게 매일 글을 쓰는 습관의 순기능인지 역기능인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잠깐 딴얘기를 하자면, 이렇게 비장하게 마음을 다지는 일까지 이렇게 오픈된 온라인 공간에서 하고있는걸 보면 놀랍다. 글을 씀으로써 마음을 먹는 일은 늘상 해왔던 일이지만 항상 내 랩탑 로컬 폴더에 저장된 문서에서였다. 그게 아니면 A4용지 몇장을 스테플러로 찍은 종이를 손으로 꾹꾹 눌러쓰는 글씨를 통해서였다. 그런데 이제는 브런치 닷 씨오 닷 케이알 슬래쉬(/) 롸이트라는 주소가 제공하는 메모장같은 플랫폼에 글을 쓰며 비장한 각오를 다지려고 폼을 잡는다.
온라인에서 먹는 마음은 오프라인에서 고요하게 먹는 마음과 과연 어떻게 다를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제다시 본론으로 돌아갈 준비가 끝났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Improvisation 20201212라는 곡 역시 맑은 고음의 금속이 울리는듯한 소리와 함께 끝이났다. 내가 시작도 하기전에 패배한 게임은 크게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시작은 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게임이라고 하는게 맞겠다. 아직 끝나기도 전에 패배한 게임이 세가지 - 첫번째는 OMA에 취업 원서를 제출하는 일. 두번째는 대학원에서의 마지막 스튜디오 수업에서 미술관 디자인의 방향을 잡는 일. 세번째는 같은 스튜디오에서 공부하는 한 친구와의 대화다.
이제는 현업에서 어느정도 물러난 렘 쿨하스라는 건축가가 시작한 OMA라는 건축설계 사무소가 디자인한 건물은 거의 모든 건축학교의 참고자료에 끝도 없이 등장한다. 그런 명성에 눌려서 서류 평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추려야 할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판단을 못했고 그래서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했다. 마음 속으로 나는 이미 떨어졌다. 제정신으로 생각했을때 내가 들어가기엔 무리가 있는 곳이고, 내가 그들이라도 굳이 나를 채용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이 이미 내려졌다.
스튜디오 수업에서는 선생님이 제시하는 방향성이 왔다갔다 하는 마당에, 적어도 내 스스로가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일만한 방향성 조차 없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에 앉아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좋은 건축이 어떤 건축이라고 생각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답을 못했다. 거기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건축 학교를 다녔지 좋은 건축이 뭔지에 대해서 머리싸메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답이 없다는건 두번째라도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다는건 문제다. 그래서 내 미술관 디자인안이 중간고사를 넘어가는 이 시점까지도 휘청휘청 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스튜디오 친구와의 대화에서 느끼는 긴장에 대한 것이다. 선생님 앞에서도 말하는 것만으로 긴장은 하지 않는데 이 친구 앞에서는 대체로 어떤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아마도 마음이 왔다갔다하는 미묘함 탓일 것이다. 이 부분은 온라인 플랫폼 위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해결의 방식을 떠나서 문제는 분명 문제다. 셋중에 현실성은 가장 떨어지지만 심각성으로 따지자면 가장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드러내기 힘들수록 문제는 심각해지는 법이다.
사람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상상을 뛰어넘는 성취의 경우에는 성취하더라도 그 성공의 실체를 알아보지 못한채 지나치거나, 반짝하고 사라지는 별똥별처럼 성공이 사라져버리고 말 확률이 높다. 실현 가능성이 없더라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라야 성공했을때 그걸 현실의 일부로 안착시킬 수 있다. 누가 이런말을 해줘서 이런 생각을 하는건지, 언제 어떤 계기로 이런 생각을 갖게됐는지는 모르겠다. 출처가 어찌됐건 상상력이 중요하다는게 핵심이다. 일단은 상상할 수 있어야 제대로된 성공이 가능하다. 그게 첫번째다.
두번째는 지속가능한 노력에 대한 것이다. '한번에'라는 말만큼 위험하고 부질없는 단어도 없다. 어려워 보이는 일일수록 한번에 이루는건 어려운게 당연하지만 세상은 정말 뜻밖의 재미가 넘치는 곳이다. 어려워 보이는 일일수록 한방에 이뤄버리려는 객기를 품기 쉽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하게 뜯어볼 필요가 있겠다. 어려워 보이는 일의 특성은 어느정도 예상가능한 노력을 훨씬 웃도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한시간 정도 바짝 하면 되겠지 싶던 일이 실제로 해보면 하루, 이틀, 일주일을 꼬박 들여야 할 때가 있다.
좀 더 확장해서 성공을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에 대해서 말해보자. 아무리 통 크게 그 성취까지의 과정을 어림잡아본다고 해도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최대한 너그럽게, 느긋하게 생각한게 오히려 옹졸하고 조급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말하자면 어려운 일은 그걸 성취하기 위한 과정 속에서 생각의 틀을 계속해서 깨나가야만 한다. 지금 갖고있는 내 생각의 틀을 깰 각오가 없는 이상은 지속적으로 노력 해나가기가 어렵다. 그리고 지속적인 노력 없이는 성취도 없다.
여기까지 글을 써내려온 결과, 온라인에 쓴 글은 그저 한편의 글로서 마무리지어질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국 마음을 정말로 두손으로 부여잡고, 제대로 먹어보기 위해서는 오프라인의 내 세계 속으로 들어가봐야 할 것 같다. 그래도 긍정적인 부분이라면, 유튜브를 끊고나서 내 상황을 좀더 깊이 바라볼 여유가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건축학도로서 좋은 건축을 곱씹어본적이 없다는 등의 거대한 문제가 드러나고 있지만, 그렇게 감춰져 있던게 드러나고 있다는건 좋은 일이다. 언젠가는 드러날 일들이다. 이만 내 세계 속으로 돌아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