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훼손해선 안되겠다.
첫 문장부터 알아먹지도 못할 육중한 말을 여섯문단이나 빽빽이 쓴것도 세상의 일부를 훼손하는 행위로 볼 수도 있을까. 글을 쓴다. 오늘은 두편째다. 자꾸만 글을 쓰는건 겁이 나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기보다 글에 매달린다. 글은 아무리 매달려도 꿈쩍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글을 훼손하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서 좋은점이 있다면 내 한계를 명확하게 인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계를 잘 알고있으면 망신당할 일이 적어진다. 10킬로쯤 달린 뒤에는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므로 하프 마라톤은 이제 피하는게 좋고, 잠을 못자면 아무리 벼락치기를 한다해도 멘탈이 무너지므로 공부가 좀 부족해도 부족한데로 잠을 자고 시험을 보는편이 낫고, 수영은 아직도 속도가 나지 않으므로 상급 레인은 비어있어도 가지 않는편이 낫고...
이정도 지점이면 다리가 말을 듣지않고 아무리 몸을 제대로 컨트롤 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내 체력으로 아무리 열심히 달려봤자 후반전 말미가 되면 공격수를 놓치게 된다는 것, 그래서 갈수록 약삭빠른 선택을 하게된다. 긍정적으로 바꿔말하면 현명한 선택이기도 하다. 엔트리가 타이트한 풀타임 경기는 가능한 피하고 언제든지 교체하고 빠질 수 있는, 재미로 뛰는 소소한 풋살정도만 뛰는 것이다. 한계에 다달아 '무너진다'는 말로서 내가 뜻하는 바는 일반적인 뜻과는 좀 차이가 있다.
나에게 무너짐이란 타인과의 소통의 다리가 무너진다는게 그 의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말하자면 내가 무너지는것도 무너지는거지만, 내가 무너짐으로써 나와 세상간의 교량이 허물어지는게 가장 두려운 부분이다. 타인들과 함께 있어도 혼자인것과 별반 다를것 없는 상태, 그런 고립이 두려운 모양이다. 아마도 학창시절 그렇게 고립된 시간을 보낸적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시간동안 가장 많이 성장했고 가장 많이 배웠다.
그때 배운 교훈중 하나는 늪을 헤어나오려고 해봤자 때가 되기 전에는 어차피 나오기가 어렵다는 것. 그러니까 어디든 빠져들때는 그냥 아주 끝까지 푹 김장독 가장 아래에 눌린 김치처럼 깊숙이 들어가보는게 좋다는 것. 그렇게 푹 숙성의 시간을 견디다보면 저절로 윗독의 김치들은 식구들의 식탁으로 먼저 여정을 떠나고 내가 세계에 나갈때가 온다는 것. 그때가 되면 더이상 안락한 김칫독 속에 머무르고 싶어도 머무를 수 없다는 것.
스튜디오 공기를 마셔본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의 스튜디오다. 아무리 마지막 학기라지만 그런 상황과 그런 절박함을 몇번씩이나 연거푸 이렇게 글로 옮기다보면 그것도 독자의 입장에선 넌덜머리가 날지 모른다. 하지만 내 글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글쓰기를 나 살자고 매달리는 철봉쯤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그렇다. 돌아보건데 이정도 시점이면 정확히, 내가 무너질 때가 됐다. 그리고 이제껏 본적없던 내 내면의 어떤 토끼구멍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때가 됐다. 이 두려움의 근원이 바로 거기에 있다. 나의 못난점이라면 그럴때마다 늘 지푸라기든 뭐든 뭐라도 붙잡고 매달리려다가 지푸라기 몇포기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등 세계의 일부에 해를 끼치고 추락했다는 사실이다.
나 자신의 모습속에, 스스로 가능한 낮춰 생각하는 정도에도 사실은 미치지 못하는 면이 있다는걸 깨닫는건 쓰라린 경험이다. 공부를 좀더 잘하는 것보다 그런 인간적인 미성숙을 조금이라도 돌아보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꽤 가치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든 저렇게든 내 길앞에 빠졌다 나와야할 늪이 있다면 그냥 점프 - 퐁당 빠져드는게 어떨까. 굳이 여태까지 그래왔듯 세상의 일부를 훼손하면서까지 내 길을 거부하는건 더이상 반복해선 안될 일이다. 훼손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사람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편한 친구나 가족들에게 화풀이를 한다거나, 말그대로 어디 창문이나 쓰레기통 등 세상의 일부를 깨어부쉰다거나 하는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행동 말이다.
늪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지만 나름대로 잘 해나가고 있는 부분도 없진 않다. 뭔가 진득이 마음을 먹고, 꾸준히 그 마음먹은 바를 실천해 나가는 일이다. 유튜브를 끊은게 그 중 하나고, 또 지난 5월부터 매일 뭐라도 쓰기로 한게 다른 하나였다. 물론 25페이지씩 읽어나가는 것은 오래전부터 계속해온 일이다. 그렇게 마음먹은걸 꾸준히 해나가는것도 늘 마음처럼 되는 일은 절대로 아니다. 마침 요즘은 그런 습관들이기가 꽤 잘 되고 있으므로, 떨어지되 지푸라기라도 붙잡지 않는걸 또 다른 습관으로 만들어보자. 지푸라기일지라도 소를 비롯한 누군가에겐 귀중한 먹이가 되고, 지푸라기 아니라 고목나무 뿌리를 잡아도 떨어질 곳에선 별 수 없이 떨어져야 하는 법이다.
세상을 꽤나 아는듯이 '-- 법이다'하고 끝맺는 말을 그렇게 싫어하던 내가 그런 식의 문장을 쓰고 말았다. 세월 속에서 내 소신이나 태도 등등이 불가역적으로 훼손 되더라도 나까지 덩달아 세계를 훼손해선 안되겠다. 이렇게 알아먹지도 못할말을 여섯문단이나 빽빽이 쓴것 역시 세상의 일부를 훼손하는 행위로 볼 수 있을까. 양심껏 이 문장을 맨 앞으로 옮겨서 훼손을 예방하기로 한다. 모든 김장독은 빠져나올 수 있는 독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제 김장독의 뚜껑을 열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