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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Nov 21. 2023

한박자 뒤로걷는 걸음과
다음편 예고: 광화문 도무스

뒤로 한걸음 내디뎌 본다. 학부 2학년 2학기의 석촌호숫가. 2021년 4월 어느날 찍은 사진. 오늘 새벽 한시 전기자전거 위에서 내린 전원. 시간 순으로 보자면 그렇다.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2학년 2학기만큼 고생한 학기도 없었다. 경제학을 복수전공하면서 영문과 전공수업도 듣는게 도저히 소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마침 아주 고약한 교수의 고약한 글쓰기 수업을 듣게되서 매 시간마다 즉석에서 글을 쓰고 피드백을 받기를 반복했다. 갈수록 자존감이 너덜너덜해지는 그런 글쓰기 수업이었다. 경제학도 마찬가지였다. 미시경제학을 수업으로 듣기엔 멋있었지만 막상 시험이 시작되고 수학적으로 문제를 풀라치면 멘탈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한학기 내내 갖은 안간힘을 쓰고 젖먹던 힘까지 모두 짜내봤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아니, 중요한건 젖먹던 힘까지 모두 짜내려고 젖먹던 힘까지 다했지만 결국 젓먹던 힘까지 다 쏟아낼 통로를 만들지 못했던 것이었다. 여기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힘도 제대로 못써보고 무너지는 그런 경우들에 대한 얘기다. 영문학 글쓰기냐, 멋들어진 미시경제학이냐 둘중 하나에 모든 힘을 쏟았다면 그래도 나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쨌건 둘다 해야하는게 내게 주어진 과제였고, 결국은 둘 모두에서 그저그런 시도를 하다가 그저 그렇게 끝나버렸다. 학기를 다 마친 뒤에 석촌호숫가에서 산책을 하는데 내가 뭘 잘못했던건지 알게 됐다. 


호숫가에서 계단을 올라오면 숲이 꽤 우거져있다. 숲의 흙바닥에서 포장된 길로 올라오는데에는 높진 않지만 그래도 명확한 턱이 있다. 흙바닥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던 꼬마들이 넘기에는 무리일지도 모르는 정도의 높이다. 그 당시에 한 꼬마가 어린이용 자전거를 타고 있었던건 분명하다. 그런데 자전거로 그 턱을 넘었는지 텀지 못하고 제자리였는지에 대한 사실관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그 미지의 장면을 보고 했던 생각만 기억난다. 그 학기 내내 내가 바로, 자전거 위에서 나지막한 턱을 넘지 못해서 낑낑대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아이와 같았다는 생각이었다. 멀리서 타인의 모습으로 바라보니 잘 보였다. 


꼬맹이의 근력으로 자전거 앞바퀴 바로 목전에 있는 턱을 넘는건 쉬운일이 아닐 수 밖에 없다. 그럴때는 일단 자전거를 뒤로 물리는게 좋다. 물론 턱을 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아가는 입장에서 뒤로 물러나는건 그렇게 쉬운일이 아니다. 어찌보면 턱을 넘는것보다 뒤로 한걸음 물러나는게 더 어려운 일이 되는것도 같다. 그게 문제였다. 턱을 넘으려면 뒤로 한걸음 물러나야하는데, 정작 턱을 넘고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당장 한걸음도 뒤로는 물릴수가 없는 것이다. 뒤로 물러나서 재밌게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저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추진력으로 턱을 부딪히면 쉽게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걸음 자전거를 뒤로 물릴 여유가 없었다. 


내 뜻과 다르게 뒤로 한걸음 밀려나야 했던 기억도 있다. 코로나 사태 초기에 로스앤젤레스로 오지 못하고 한국에서 줌을 통해 수업을 들어야 했다. 야심차게 회사를 정리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오히려 문은 닫히고 머무르던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때 집주변을 정처없이 거닐다가 발견한게 광화문 주변의 도무스 잡지사 사무실이었다. 도무스는 이태리에서 발행하는 건축에 대한 아주 유명한 잡지다. 보기만 해도 이건 디자인에 대해서 한마디 하는 잡지라는게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좋은 디자인의 공간이었다. 건물의 입면, 즉 파사드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때 어쩔수없이 한국에 머무르며 서울 곳곳을 다니면서 봤던 건물들에 대해서 지금 쓰고 있는 셈이다. 도무스도 그중 하나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길에 발견했던가.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건 지금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오는길에 날씨가 너무 추워서 전기자전거의 전원을 스스로 내리고 페달을 밟았다. 다리에 힘을 바짝 줌으로써 몸에 훈훈한 열기를 좀 올리려는 심산이었다. 춥고 빠르기보단 뜨겁고 느리기를 택한것이다. 한박자 뒤로 돌리는건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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