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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Dec 03. 2023

나는 뉴규인가

마트에 갔다가 들어오는데 하늘 저 멀리 하얀색 기다란 선이 오른쪽 위로 천천히 그어져가는게 보였다. 아주 먼곳이었다. 그 가느다란 선의 넘나들며 날아다니는 서너마리의 새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천천히 슬로 모션처럼 날아가는 비행기와 그못지않게 여유롭게 둥근 원을 그리며 나는 새들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마음이 사로잡혔다는 말로는 정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는 그 감정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질문을 던져본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아이폰을 꺼낼까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다는건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몇초정도를 두 눈으로만 감상했다. 


그러다 결국은 카메라를 꺼내고 말았다. 짧은 동영상과 사진 몇컷을 찍었고, 너무 당연하게도 내가 본 장면의 아름다움은 담기지 않은걸 확인했다. 오늘 한가지 더 알아차린점이 있다. 내가 카메라에 담으려고 한건 내가 본 장면이 아니라 그 장면에서 내가 느낀 마음속의 감정이라는 점이다. 그 말도 못하게 평화롭고 여유로운 두 존재의 비행이 어우려져 만들어내는 무엇인가를 시간속에 박제하고 싶었는데 늘 그렇듯 실패하고만다. 실패는 어쩌면 거리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비행기와 새의 궤적이 아름다운건 멀직이 떨어져 바라보기 때문이고, 카메라로 찍은 이미지의 경우엔 기껏해야 내 눈에서 내 손바닥까지의 거리정도 떨어진 몇백만 화소들을 바라보는 것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정말로 비행기를 가까이서 보는건 재앙일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뜨겁게 돌아가는 엔진과, 엄청난 굉음과, 실제로 보면 전혀 평화롭고 여유롭지 못할 시속 몇백킬로미터의 속도까지. 꼭 비행기가 아니라도 실제로 내 육신에 바짝 붙어서 돌아가는 현실은 그렇게 평화롭지 못하다. 어젯밤에 집에 돌아와 여태껏 그려놓은 미술관 도면을 보면서 내 앞에 닥친 재앙의 크기를 절절히 체감할 수 있었다. 벽의 굵기는 물론이고 각도와 정렬상태가지 대체로 보이는 대부분의 것들이 엉망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돌아가는 여러가지 다른 일들 때문이었다. 


때문이었다. 때문이었다 속에는 진실이 숨어있다. 때문이었다가 실어나르는 현실적인 구실들로 인해서 빚어진 나 자신의 현위치가 정확히 어딘지를 드러낸다. 의도상으로는 나의 현위치를 숨기려는 말이지만, 그게 역설적으로 진실을 드러낸다. 무엇때문에, 누구때문에, 시간때문에 도면이 엉망인거라면 결국 도면은 엉망이라는 말이다. 그 무엇과, 누군가와, 시간의 제약은 죽기전까진 평생 함께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글이 이렇게 진지해져서 어쩌나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것 갈데가지 가보기로 한다. 


이런저런 핑계로 인해 빚어진 현재의 내 모습을 바라보자. 나는 어떤 모습인가. 그 사람이 나인가. 나는 누구인가. -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언제부턴가 희화화됐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하는 질문은 사라지고 '나는 뉴규 여긴 어듸?' 하는식으로 변이가 일어났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건 정말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라기보다 멘탈 붕괴의 여러 증상중 하나로서 받아들여질 때가 많아 보인다. 이런걸 진지하게 분석조로 말하고 있는 내 멘탈도 그렇게 안정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뉴규? 


그렇다면 지금의 나 역시 멘붕에 빠진걸까. 그런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무너진 사람의 넋두리로서 소비하기엔 이 질문은 너무 귀한 질문이다. 현실적인 쓸모가 전혀 없어서 버려진 질문이고,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우스꽝스럽게 비꼬는 하나의 수사로 전락한 질문이지만 여전히 귀한 질문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한 질문인지 설명해낼 자신이 없다. 그래도 시도해보자면 이렇다. 길을 잃었다고 가정하자. 길을 찾기위해 여러가지 유효하고 실질적인 방법을 찾기위한 질문들을 찾아보지만 그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갈 수 있다. 태양이 어디에 있는가, 어디 다른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나, 내 지난 발자국이 남아있을까, 어떤 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가 등등. 이 모든 외부적인 환경에 대한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없다면, 얻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무너지곤 한다. 


나에게 '무너진다'는건 내면을 향해 쓰러진다는 뜻이다. 그 시점부터 던지는 질문은 뜬구름 잡는 질문들이 된다. 여느 술자리에서는 꺼내봤자 조용히 묻히고 말, 침묵만 자아낼 그런 질문들이 시작된다. 예를들면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처럼 말이다. 여기서부터는 증거에 기댄 길찾기가 멈추고 신념에 기댄 길찾기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내면의 세계에는서는 구글링도 할 수 없고 정책적 보호나 보험사의 손해보상도 기대할 수 없다. 타인들은 보지 못하는 발걸음을 혼자서 떼어나가야 한다. 아마도 이 글 역시 서두에서부터 바로 이곳 말미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이 하나둘 떠나가 결국 바로 이 문장은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문장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턴 아무 말이나 막 써도 되지 않을까.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또 누구인가. 아무도 안볼텐데 반말로 해도 되지 않을까. 아, 이미 반말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반말과 존대도 구분하지 못하는 나는 누구인가. 진지하게, 나는 누구인가. 대학원 학생이기 전에, 경력 증명서에 기술된 그 인물이기 전에, 브런치에 문장을 남기는 가소로이기 전에, 누군가의 아들이기 전에, 대한민국 국민이기 전에, 구매력이 폭락한 30대 잠재 소비자이기 전에, 어느 웬사이트의 방문자이기 전에, 소셜 플랫폼에 업로드된 프로필 이미지의 장본인이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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