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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Dec 18. 2023

이름없는 사람과 금액없는 돈

기사단장 죽이기 리뷰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는 주인공의 이름이 소개되지 않는다. 1인칭으로 쓰여지기 때문에 그래도 흐름상에 문제는 없다. 하지만 작가의 다른 소설고 비교해봤을 때 흔한 경우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실제로는 소설의 세계에서 중요한 존재가 가지는 명목상의 형식이 부재하는건 주인공의 이름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주인공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는 또다른 주요 등장인물인 멘시키씨가 제시하는 정확한 액수 역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보통의 가격선을 훨씬 웃돈다는 설명과, 그 금액을 들은 인물들이 놀라는 반응만 제시될뿐 정확히 얼마인지는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이 부재의 구도를 찬찬이 뜯어보면 소설 전체가 설계된 구조와도 이어지는 지점이 없지않다. 주인공의 역할을 하는 한 사람, 존재가 있고 그 사람을 부르는 언어로서의 이름이 있다. 그리고 주인공의 존재는 지속적으로 제시되고, 그의 행동, 생각, 타인과의 상호작용은 계속해서 뻗어져나간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끝까지 공백으로 일관된다. 초상화의 금액 역시 마찬가지다. 그 금액을 두고 이런저런 인물들은 저마다 놀라움을 표하고, 주인공 역시 그 금액으로 인한 갈등과 끌림과 호기심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 금액을 정확히 표현하는 숫자 - 그 기호는 끝까지 숨겨진다. 이런 구도는 실체와 이름, 내용과 형식이라는 프레임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책을 구성하는 상 하권의 타이틀과도 연결된다. 


상권의 부제는 현현하는 이데아이다. 이데아는 그림자의 형태로만 드러나는 어떤 존재의 실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주인공의 이름이 주인공의 그림자라면 주인공의 존재 자체가 이데아가 되는 것이다. 초상화 의뢰금액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초상화 금액 그 자체가 이데아이고 금액에 대한 인물들의 반응은 이데아의 그림자로 이해하는데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우겨본다면 우겨볼 수 있겠지만 어딘가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금액 자체는 이데아라고 치더라도 그에대한 인물들의 반응이 그 금액의 또다른 투영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권의 부제인 '전이하는 메타포'는 어떨까. 이데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림자를 통해 드러난다면, 메타포 즉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 속에서 지시를 통해 이동/전이하는 구조를 품고 있다. 하지만 초상화 금액의 경우엔 딱히 메타포의 일종으로 볼만한 요소가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금액은 사람들의 실제적인 반응을 끌어내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실체없이 비어있을 뿐이다. 주인공의 경우 이름이 없는 것으로 그 존재 자체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금액의 경우 타자들의 반응이 있을뿐 숫자라는 이름을 상실하면 그 자체의 존재역시 희미해지고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상화의 보상액은 주인공의 이름과 같이 부재하는 어떤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공백처럼 읽힌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돈이 작동하는 방식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다. 돈은 실체가 없지만 타자의 반응을 통해 정의되는 어떤 것이다. 돈은 그 자체로 가치의 표상에 불과하고, 그래서 숫자와 화폐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만, 그것이 교환가능한 대상들로 인해 가치를 부여받고 욕망의 대상이 되는 존재다. 그러고보니 메타포와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돈은 교환가치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는 것으로 메타포가 원관념을 지시하고 의미의 교환 가능성을 통해 그 의미를 부여받는것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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