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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Dec 19. 2023

사랑에 대한 갈망의 명과 암

버드맨 리뷰같지않은 리뷰

실력에 비해서, 가진것에 비해서 너무 많은걸 바라는 마인드에 대해서 써보자. 그리고 친절한 사람에게 더 많은 친절을 요구하는 마인드에 대해서도 써본다. 둘 모두 바로 내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문제적 마인드들이다. 글이 꽤나 염세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예정이라는 점을 독자분들을 위해 미리 알려드리는 바이다. 아마도 염세적이 되기 쉬운 세상에서 누군가의 염세적 세계관과 자아가 빽빽이 들어찬 글을 읽는건 그리 가치있는 일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리 진입금지 표시판을 여기에 박아두기로 한다.  


요즘 스스로 돌아보는 나는 놀랍도록 염치가 없다. 말하자면 아무것도 하지않고 내것도 아닌 음식을 앞에두고 침이 뚝뚝 떨어지는줄도 모르고 시선을 빼앗긴 강아지와 크게 다를게 없다. 어느 TV프로에서 강아지들이 자신에게 할당되지 않은 음식을 건드리지 않는 교육을 받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나도 그 교육을 함께 이수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자면 자세한 사실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할텐데 아무래도 부끄러워서 자세한 이야기를 꺼내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글이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겨우 두문단에서 멈춰서 그 아래로 하얗게 도사리고 있는 공백을 바라보노라면 허깨비 같은게 보이는 듯 하다. 여기까지 써놓은 두 문단에서 군침이 조금씩 고이다가 뚝뚝 한번씩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건 마치, 두 문단 이후의 문단들을 어떻게 해야 좀더 먹음직스럽게 쓸 수 있을지 고민하는 마음의 군침과도 같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더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한마라의 강아지의 마음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명예에 굶주리고, 사랑에 굶주린건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영화 버드맨을 봤는데, 영화의 초입에 그런 맥락의 문구가 나온다. 


And did you get what 

you wanted from this life, even so? 

I did. 

And what did you want?

To call myself beloved, to feel myself 

beloved on the Earth. 


레이먼드 카버의 짤막한 시, Late Fragment의 전문이다. 예전에는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든 말든, 나는 내 삶을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스스로를 돌아보면 이 세계의 칭찬과 비난 하나하나에 말도못하게 휘청거리거나 춤추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게걸스럽게 사랑을 빨아드리려는듯 침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구,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인정투쟁 모두 비슷한 맥락의 마음들이다. 


버드맨이 재밌는건 그런 인정투쟁에 인생의 모든걸 내건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는 방식에 있다. 적어도 나는, 그리고 내생각엔 일반적으로 모두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게 당연하리라 믿었던 인정투쟁이 결코 부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소위 왕년에 헐리우드 히어로물의 주인공으로 날렸던 주인공이 다시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지만 결국 그런 투쟁의 끝에서, 벼랑 끝에서, 우스꽝스러운 사고로 벌거벗은 속옷차림으로 뒤늦게 본인의 대사를 무대 뒷편으로부터 말도 안되게 소리치며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 그리고 가짜 권총 대신 실제 권총을 들고 마지막 자살 씬을 소화하는 모습, 어떻게 운좋게 살아난 병실에서, 내내 환상에 시달리던 버드맨의 날개단 비행을 위해 정말로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모습, 그런 모습들은 비극의 끝을 보여주는 듯 하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을 장식하는 주인공의 딸(엠마 스톤)의 시선은 이 모든 시선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에도 왕년에 대한 영광의 환상을 못버리고 창밖으로 뛰어내린건가 - 싶지만 사실 주인공은 권총씬으로써 버드맨의 마스크를 벗어 던졌고, 자신만의 진정한 날개를 펴기위해 뛰어내린 것이다. 병실에서 사라진 아버지를 보고 놀라 불안하게 창밖을 서둘러 바라보는 엠마 스톤의 시선은 그래서 바닥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이내 하늘을 향해 상승한다. 세상이 입혀준 버드맨의 망토를 벗어던지고, 그 자신의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일 것이다. 


영화는 세상의 사랑을 갈구하는 그 게걸스러운 욕망이 그저 탐욕으로 끝난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세상의 사랑을 갈구하는게 잘못된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사랑을 쫓는 마음이 자신에 대한 허상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힘이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주인공과 딸의 세대차이를 대변하는 바이럴에 대한 시선역시 영화 후반에는 변화한다. 초반에는 소셜 미디어도 결국은 세상의 사랑에 대한 갈증이라는 점에서 비극적이고 파국적인듯 그려진다. 하지만 결국은 엠마 스톤이 만든 채널이 주인공의 기행을 바이럴 시키며 오히려 그의 목표를 이뤄가는데 보탬이 된다. 소셜 미디어도 그 나름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영화는 시종일관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를 연극의 형태로 반복해서 플레이한다. 나는 그 책을 구입만했지 읽어보지 못해서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카버를 좋아하는 작가로 알려진 김연수님의 문장중 떠오르는 한 구절이 있다. 


우리가 계속 지는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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