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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Dec 29. 2023

사적이기만한 일기의 구원을 위한
그런류의 목표 이야기

따뜻한 우유를 마신다. 아무리 LA라도 겨울 밤은 꽤 쌀쌀하다. 이렇게 분위기를 조성해본다. 책상 한켠에는 모래 한줌과 함께 4센치 가량 길이의 투명한 아크릴 기둥 서너개가 들어있는 플라스틱 병이 있다. 약 7년 전부터 보관해온 병이다. 모레는 사실 한줌도 안되는데, 손가락 한마디 정도도 안되는 양으로 브라질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담아온 것이다. 자연 유실이 마음에 걸려서 조금만 가져온다고는 했지만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가져온건 가져온것, 돌이킬 수 없다. 투명 아크릴 기둥은 하인리히라는 친구가 건축 모형에서 떨어져나간걸 나에게 보관해달라며 건네줬던 것이다. 


그때는 건축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인리히는 자하하디드(UFO같은 동대문 DDP를 지은 그 건축가다) 소속으로 당시에 내가 진행하던 프로젝트의 공간 디자인을 맡았었다. 어리벙벙한게 자하하디드라는 이름이 유명무실한듯 보이게 했던 덩치만 큰 오스트리아 친구였다. 발표를 못해도 그렇게 못하는건 처음봐서, 우리 회사의 공간 디자인팀 동료도 적잖이 기대가 어그러진 눈치였다. 이찌됐든 그 친구는 영국 본사에서부터 정성스럽게 만들어 공수해온 건물 모형에서 기둥 몇개가 떨어져나간게 마음에 많이 걸렸던 모양이다.


지금 살펴보면 약 2미리 두께의 투명 아크릴을 레이저 커팅해서 만든 기둥으로 보인다. 잘려있는 단면에 가느다란 줄무늬가 반복적으로 나있는걸 보면 레이저 커터를 사용한게 분명하다. 그때는 건축을 이렇게 공부할 줄도 몰랐으면서 왠지 그 별것도 아닌 가느다란 기둥들을 절대 잃어버려선 안될것 같은 마음이었다. 한편, 브라질에서 양심을 팔아먹고 가져온 모래 반의 반줌은 그곳에서의 첫 출장업무를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때역시 건축 공부는 꿈에도 없었다. 내 첫 출장업무란, 회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디자인한 파빌리온이 브라질 이곳 저곳에 제대로 지어지는지 삼사일에 걸쳐 감독하는 일이었다. 마케팅 하는 회사에서 어쩌다 그런 일을 하게됐는지 의문이다. 이제보면 완전히 건축 업무이기까. 


쓸데없는 사사로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목적에 대해서 써보자. 내 목적이 뭐냐보다 목적 그 자체의 의미나 기능에 대해서 말이다. 목적은 그 종류도 다양하고 삶에 미치는 영향도 가지각색이다. 어떤 목표는 변호사, 판사가 되는 것처럼 아주 명확하고 사회적으로 완벽한 소통이 가능하다. 그에 반해 어떤 목표는 아주 개인적이고 내밀해서, 남들에게 뭔지 설명하기도 애매하고 설명해낸다고 해도 금세 잊혀지곤 한다. 그런 목표는 성격상 예를 들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그런 목표 중에는 자기 자신에게만은 밤하늘에 터지는 폭죽처럼 명확한 것도 있다. 


그런 목표야말로 한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어떤 직업이라던가 물질, 명성에 대한 욕망 역시 힘이 세지만 - 정말 세지만 - 그런 것들은 선택된 소수만을 종착역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배타적이다. 하지만 타인과 공유하긴 어렵더라도 본인에게만은 더없이 명확한 목표는 그 사람을 어딘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점으로 이동시켜놓는다. 다만, 그 지점이 직업이나 재산처럼 명확히 정의내리기가 어렵다는게 단점이자 장점이다. 본인도 그  종착역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그 실체가 뭔지 얘기하지 않으면서 그런 류의 목표의 특징만 말하자니 글이 더없이 두리뭉실해지고 말았다. 이럴때 은유가 도움이 될텐데 적절한 은유도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은 은유가 있다고 해도 결국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지금 얘기하는 그런류의 목표는 그 목표를 품은 그 자신에게만 의미있고, 자신에게만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위에서 얘기한 투명 아크릴 기둥 서너개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쓰레기나 다름 없을 것이다. 그 기둥이 떨어져 나온 모델에 대한 이미지와, 보더콜리가 양을 몰듯 나를 자주 미칠 지경까지 몰아붙이던 그 프로젝트에 대한 기억들 없이는, 그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되지않을만큼 혼돈 가득했던 나날들을 거쳐오지 않은 이에겐 그저 작은 플라스틱 조각에 불과하다. 생각해보면 이런 류의 목표 역시 아주 배타적이지만, 이 배타성은 결과적 배타성이 아니라 과정상의 배타성이라는 점에서 직업적 목표와 차이가 있다. 나아가 이 배타성은 상대적인 가치를 넘어서는 절대적 가치를 만들어낸다. 누가 뭐라건 한 개인의 삶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류의 고유한 목표를 찾는게 삶 전체를 좌우하는 중요한 과제인지도 모른다. 그런 목표는 찾게 되더라도 찾았다고 굳이 떠벌리지 않게되는, 그저 마음속으로 차를 우려내듯 감상하며 감사하게 되는 그런 류의 목표다. 아마도 그래서 진짜 좋은 삶은 세상에 잘 드러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보이는건 대체로 남부럽지 않은 자리에 앉은 이들의 말과 일과 힘이지만 그런건 어쩌면 헤쳐나가야할 하나의 매혹적 잡목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류'의 목표를 찾기위한 과정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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