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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Mar 22. 2024

증빙필참의 세계 속
자전거 탄 기억상실

인증샷을 찍지말고 그냥 삶을 살자고 생각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오르막길이 끝나고 내리막 직전의 횡단보도에 다다라 있었다. 첫문장 치고는 좀 불분명한 문장이라 다시한번 써보는게 나에게도 독자님들에게도 좋을 것 같다. 인증샷을 찍지말고 그냥 삶을 살자고 생각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정확히 말하면, 인증샷을 찍지말고 그냥 삶을 살자는 이 언어의 조합을 만들어내다보니 외부 상황에 대한 인식이 옅어졌다. 말하자면 노 인증샷 그냥 살자는 말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말이 아니다. 그래 보이지 않지만 은유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말이다. 가장 가까이로는 여행지에 갔을때 사진기를 꺼내들지 말고, 그저 눈에 담는게 진정한 여행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조금더 의미를 확대하면, 내가 경험하는 세계의 일부 혹은 순간의 조각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다른 누군가 - 그게 자신일지라도 - 와 공유하려는게 하나의 축이고, 그 반대편에는 지금 이 공간과 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지금 이곳에서 나 자신만의 체험으로 온전히 남기려는 축이 있다. 


공유의 축은 물론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그 나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가치가 있다. 기쁨은 나누면 두배가 되고 슬픔은 반까이가 된다는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이 세계는 대체 증빙을 요구하는게 일반적이다. 그렇다고 거짓된 세계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문제는 백 중 한둘만 거짓을 진실로 포장한다해도, 결과적으로는 백 전부가 증빙을 지참해야하는 세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깨끗한 세계를 만들기는 어렵지만 부정한 세게를 만드는건 단 한방울의 거짓이면 족하다는 진부한 교훈. 여튼, 그리하여 우리는 증빙 필참의 세계를 살아간다. 시험을 치르고 성적을 받는것 부터가 증빙 지참의 일환이다. 내가 똑똑하면 똑똑하다는, 혹은 아직 똑똑해지는 중이라면 아직은 그렇다는 증빙이 숫자로서 남는다. 


취준하는 이들에게 이력서는 증빙의 백화점이다. 서슬퍼런 백화점이랄까. 이민자의 삶에서도 증빙은 꽤나 날카롭게 날서있는 경계로서 기능한다. 증빙. 입국 몇일 전부터 몇일 후까지 주소 전달, 졸업 몇달 전부터 신청해야할 것들, 직업관련 보고들, 주단위 최소 업무시간에 대한 증빙, 참조인 편지 등등 온갖 증빙이 삶의 지분 10프로 정도는 채운다고 봐도 무방하다. 증빙은 함께사는 세계, 약간의 거짓이 섞여 모두가 진실을 굳이 증명해야하는 세계에서는 꼭 필요하다. 사회를 위해서는 그렇지만,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꽤 큰 부작용을 불러온다. 증빙은 한 개인이 뿌리내린 시간과 공간의 토양으로부터 그 뿌리를 살며시, 그러나 지속적으로 당기는 힘과 같다.


실제로 '몰입'이라는 상태는 아주 작은 요인으로도 흐트러지기 쉽다. 단적으로 유튜브만 봐도 그렇다. 모든 중독성 강한 컨텐츠 플랫폼은 최소한의 터치 - 가능하면 단 한번의 터치로, 혹은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아도 컨텐츠로의 몰입을 유도한다. 유튜브의 영상추천 알고리즘이 그런 식이고, 자동재생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어폰 리뷰 영상을 일단 한번 보기 시작하면 오르편 사이드바에는, 이어폰 리뷰로 10만 20만뷰를 넘긴 귀에 착착 감기는 영상들이 줄을 선다. 손하나 까딱 않아도 그중 최상단의 영상은 자동으로 재생되고, 그 아래 몇번째를 보고싶다면 그역시 터치 한번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한시간 두시간을 보게되는 유튜브가 원망스럽고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서 한가지 단순한 규칙을 세우고 난 뒤에는 결코 유튜브에 몰입하게 된적이 없다. 


그 규칙이란 영상을 보려면 반드시 플레이 리스트에 추가한 뒤에 시청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규칙이 엄청난 장애물이 되지도 않는데 효과는 엄청나다. 흥미로운 영상을 발견한다. 쩜쩜쩜 아이콘을 누른다(1회), 플레이리스트 추가를 누른다(2회), 만들어둔 플레이리스트중 저장할 곳을 하나 선택한다(3회), 앱에서 플레이리스트 메뉴로 이동한다(4회), 영상을 추가한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터치한다(5회), 최하단에 추가된 영상으로 스크롤해 내려가(6회) 영상을 클릭한다(7회). 번거롭긴 번거롭구나, 싶지만 별건 아니라면 또 아닌 프로세스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형식들로 몰입은 작살이 난다. 


유튜브의 몰입이 깨지는 일은 나름 순기능으로 볼 수 있지만 삶에의 몰입이 작살이 나는건 똑같이 순기능으로 보긴 어렵다. 좀 살아보려고 하면 이런서류 내세요, 저런 서류 내세요, 언제까지 내세요, 우편으로 내세요, 어디 방문 하세요, 전화좀 받으세요, 등등. 서류를 내다가 서류의 주인인 나라는 존재가 살아갈 시간이 훼손되는 모양새다. 안타까운건 그렇게 증빙을 싫어하면서도 한번 길이 들기 시작하면 나 스스로가 불안에 못이겨 항상 증빙부터 마련하려는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기록으로 남겨야하나, 어디 제출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하다가 놓치는게 삶의 순간순간들이다. 


나는 무엇을 놓쳤는가. 자전거 위에서 오르막을 올라가는 그 몇분의 시간을 완전히 놓쳤다. 물론 증빙을 남기려는 이유가 아니라, 증빙에 목메는 삶을 살기보다 그냥 살자는 생각을 하다가 놓친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오르막의 페달 밟는 시간이 삭제된 탓에 좋았던 것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항상 힘겨운 구간이었고, 일엉서서 체중을 실어서 밟아야 할때가 많은 곳이었는데 완전히 기억 속에서 날아갔다. 증빙을 잊자는 생각에 몰입하다보니 날아간 것들이다. 그렇게 가볍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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