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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Mar 27. 2024

캠퍼스, 도서관, 뷔이페,
세계의 확장과 세개의 변주

세상의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떴다. 이렇게 지평선이 한번더 몇걸음 멀찍이 물러났다. 너무 많이 먹어서 힘들수도 있다. 이게 아닌데, 좀더 날카롭게 표현을 해보자. 같은말이라도 그걸 전달하기위한 최적의 형태가 있다. 그게 담고있는 의미라는 몸뚱이가 쫄쫄이를 입은것처럼 착 감겨서 몸이 옷이고 옷이 몸인듯한 그런 옷과같은 문장의 형태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건축계의 오래고 오랜 형태와 기능의 구렁텅이로, 그 샛길로 빠질듯 말듯한 낭떠러지의 자력을 겨우겨우 이겨내고, 이겨내면서 오늘의 주제를 향해 나아가본다. 


너무 많이 먹어서 힘들수도 있다. 이게 버전 1이다. 늘 빠지기 쉬운 함정은 답을 즉시 맞추려고 덤비는 것이다. 버전 2를 지금 바로 쌈빡한 것으로 - 요즘 단어가 있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 까리하다도 아니고, 어쨌건 이렇게 단박에 그럴싸한 답에 도달하는건 불가능하다. 과정이 필요하다. 무슨 일이든 계단을 하나씩 착착 밟아올라야 원하는 지점까지 오를 수 있다. 원하는 지점에 오르는 여러가지 방식중에서도, 눈앞에 한계단씩 밟다보니 거기 올랐는지도 모르고 어느새 올라있는게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다. 그래서 내가, 너무 많이 먹어서 힘들수도 있다는 의미를 담을 최적의 그릇으로서의 문장을 찾기위해 밟을 첫번째 스텝은 무엇인가. 


일단 USC의 뷔페로 가보자. 정확히는 USC Village Honors Dining Hall이다. 외국 아니랄까봐 이런저런 명사 형용사 같은게 덕지덕지 붙어서 긴 이름이다. 그러나 오늘 내가 먹은 접시 숫자를 따라가진 못한다. 고작해야 다섯개의 어절로 구성된 공식 식당명이지만, 나는 다섯접시를 훌쩍 넘게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첫번째 접시는 우리나라 돼지 수육의 조금 퍽퍽한 육질을 생각나게 하는 고기찜과 브로콜리, 렌틸콩이었다. 고기는 두께역시 수육과 같은 두께로 썰어졌지만 그 위로 뿌려진 소스랄까 시즈닝은 완전히 외국식, 녹색에 점도가 높고 맛은 약간 시큼하지만 호 불호중에선 호에 가까운 소스였다. 두번째 접시는 면요리인데, 넘어가기 전에 내가 왜 유에스씨 빌리지 오너스 다이닝 홀에서 식사를 하기로 한건지 설명을 해야하겠다. 


지난 일요일, 잠이 오지않는 한밤에 나는 여행을 가야할 타이밍이라는걸 깨달았던 것이다. 근 세달간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방에 쳐박혀서 625 포병이 몰던 재래식 박격포를 근대화시키는 작업을 하듯 포트폴리오를 개조 혹은 개화시켰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세달이 지나있었던 셈인데 그러다보니 여기저기 팔꿈치와 팔목에 금속 조인트가 박혀있는것만 같은 감각이 생겨났다. 그것도 내 세계의 지평선의 확장이라면 확장이었다. 새로운 감각들에 눈을 떠나가는 것이므로. 그리하여 이번주도 지나간 한주와 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식으로 소화하다간 금속 조인트가 언제 튕겨나갈지 모른다는 예감이 몰려왔다. 부정확한 예감이었을까. 


그래서 답은 여행이었다. 지난 언젠가 여름방학에 샌디에고로 여행을 갔다가 여행중 여행이 아니라 골치아픈 글을 마저 쓰는게 내가 이 순간에 할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일정보다 서둘러 여정을 마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그 샌디에고로 향하는게 자연스런 수순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샌디에고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또 괴상한 글쓰기를 향해서 돌진했다. 잭 머피에게 보낼 이메일 한통, 겨우 이메일 한통에 담을 문장을 쓰는 작업으로 돌아갔다. 샌디에고는 이번에도 소개팅에서 바람맞은 사람처럼 나에게 바람을 맞았다. 두번째다 미안합니다 디에고씨. 성자이신 디에고씨를 두번이나 바람 맞히다니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달의 이런저런 작업으로 지친 몸과 마음에 이메일에 담을 언어의 조각들이 제대로 배열될리 만무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USC의 도서관에 수록되어있는 내 몸과 마음을 설명해야겠지만 이번에도 '정신을 차려보니'라는 두 어절로 퉁쳐야할 수 밖에 없겠다. 여행이라는, 휴식이라는게 나에게는 활기차고 아름답게 햇살 내려쬐는 캠퍼스의 도서관과 딱 맞아떨어지는 개념이었나보다. 나는 어제, 월요일엔 캠퍼스 바로 입구의 Leavey 도서관에 포장되어 있었고, 오늘 화요일엔 Doheny 도헤니 메모리얼 도서관에 단정히 포장되어 있었다. 


마치 기나긴 웜홀을 통과하는 여행을 견디기 위한 안온한 동면장치를 찾아낸 느낌이었다. 도서관은 그런 동면장치다. 차갑지만, 온도의 차원을 넘어서 더더더욱 차디차찬 여정을 견디게 해주는, 온도의 차원 속에서의 차가움으로 설명가능한 그런 동면장치 말이다. 일단 그렇게 온도의 차원을 넘어서 말하자면 나름 안온한 - 편안하고 따듯한 동면장치로서의 도서관에 나를 앉히고 나자 두번째 문제는 역시 인풋이었다. 무엇을 먹일 것인가. 캠퍼스에선 역시 학식이다. 학식을 맛보자. 내가 다닌 나의 학교에는 학식이랄게 따로 없어서 이제껏 맛보지 못한 음식의 유형이었다. 학식. 그것은 마치 엄마없이 자라 이제껏 맛보지 못한 엄마밥을 먹는 느낌이었다. 엄마밥 두접시째가 그렇게 국수요리로 채워졌다. 


원료는 몰라도 녹색의 부들부들한 면 한덩이, 조금 말캉말캉한 흰 쌀면 한덩이를 덜어서 간장 소스같은 갈색 양념을 끼얹었다. 두부 요리를 덜어얹고, 이런저런 야채를 추가하고, 녹색 콩을 한국자 퍼고, 그밖에 기억나지 않는 건강한 것들도 추가. 그리고 초코맛이 나는 두유도 한컵, 그이전에 사과주스도 반잔. 국수아닌 음식거리가 반 이상이라 국수라서  그렇다고 하긴 뭣하지만 국수라서 그런것마냥 후루루룩 두번째 접시도 그렇게 사라졌다. 세번째 접시를 논하기 전에 첫번째 접시에 연어 찜 비슷한 생선요리도 있었다는걸 언급해야겠다. 수육 비슷한 고기와 비등한 절반의 비율을 차지했던 생선이기 때문에 언급않고 넘어가는건 공평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세번째 접시는 마치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발견한 샐러드 코너였다. '신'대륙이라는 말은 사실 잘못된 서구중심적 단어다. 그당시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에게나 신대륙이지 어엿이 역사깊은 원래의 주민들이 살아가던 그저 한나의 대륙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내 시야의 왼편이 아닌 오르편 끝에 자리잡고 있던 샐러드 코너역시 신대륙은 아니었다. 그곳에는 주로 여성의 비율이 좀더 높은 학생의 무리들이 좀더 많이 머무르는 모습이었다. 나도 그들이 지키고 있던 대륙에 발을 디뎠다. 평소에 채소를 챙겨먹는건 쉬운일이 아니다. 한두가지 채소야 가능하다 쳐도 다양한 채소를 한접시에 골고루 담아서 냠냠 하기는 어렵다. 거기에 삶은 달걀과, 짭조름한 닭가슴살 조각들을 곁들인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수박도 아니고 뭔지 이름을 알 수 없는 달달한 생과일의 즘을 담아놓은 작은 컵도 하나 들었다. 색깔만 수박색에 깨소금 부서지는 듯한 과일씨가 동동 떠있는 그것. 패션 푸르트였는지도 모르겠다. 


네번째와 다섯번째 접시는 하나의 세트라고 봐야겠다. 초코케익과 라즈베리 파이를 두조각씩 담은게 네번째 접시, 그리고 쿠키앤 크림 아이스크림 한스쿱 또 바닐라맛 아이스크림 한스쿱을 담고 채썰듯 얇게 저민 아몬드를 윷놀이판에 윷뿌리듯 듬뿍 흔뿌린게 다섯번째 접시였다. 마치 혼을 갈아서 음식 묘사를 하는게 이 글의 목표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는 애초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이쯤되면 버전 2가 등장할 자양분이 충분히 마련된 셈이다. 애초에 내가 욕심내던게 뭔지 가물가물하다는게 그 증표다. 바라고 바라던 마음이 가물가물해 졌을때에야 바라던 그것이 겨우 나타날 가능성이나마 생겨난다는게 내 지론이다.


버전1. 너무 많이 먹어서 힘들수도 있다. 

버전2. 다섯접시에 음료수 세컵을 먹고나니 내 몸의 내부에 엄청난 철옹성이 세워진듯한 감각이 들었다. 자 이제 외부에 있는 그 무엇도 내 몸의 내부로 들어올 수 없다. 고체는 물론이고, 액체는 당연하고, 기체도 예외가 아니다. 고체이면서 액체인것도, 액체이면서 기체인것도 빼박이다. 한가지, 그 철옹성을 이루는 바윗덩어리들을 지면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을 지구가 아닌 나 자신이 만들어내는 느낌이라는 것. 셀 수 없는 바윗덩어리들을 땅으로 꾸욱 끌어당기는 중력을 직접 만들어내는 중노동을 하는 정도의 힘이 과식한 육체에 부과된다. 그래서 버전2 문장은 언제 나오는거냐고 묻고 싶지만 이미 나왔다. 버전 2는 보통 이렇게 사족이 지나치게 많이 붙어있다. 그래서 그게 결코 괄호안의 답안에 써넣을 답으로서의 문장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하기 어려운 그런 형태다. 


버전 2. 과식한 육체에는 셀 수 없는 바윗덩어리들을 땅으로 꾸욱 끌어당기는 중력을 직접 몸소 만들어내는 중노동을 하는 정도의 힘이 부과된다. 

사실 버전 2가 나오고나서 버전 3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버전 1에서 2로 넘어가는 어려움과는 이제 결이 다른 새로운 형태의 어려움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제는 바꾸고 덧붙이는게 아니라, 제거함으로써 축소하는 작업의 시작이다. Less is More은 여기서부터 성립하기 시작한다. 버전 2에서 3으로 이행하는 세계의 규칙은 생략이 곧 미덕이라는 것. 그러므로 과정도 생략하기로 하자. 


버전 3. 체감 몸무게 = 기존 몸무게 + (과식 섭취분 중량)^3

주1> 꺽쇠는 제곱의 컴퓨터식 기호다. 

주2> 과식 섭취량을 비롯한 중량은 지구에서 작용하는 중력을 기준으로 한다. 

주3> 과식 섭취분 중량에 제곱이 아닌 세제곱을 취하는 것은 무게를 가진 대상이 3차원의 체적을 갖는것에 근거한다. 

정확히 뜻어보면 강아지의 울음소리와 다름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최소한만 남기고 걸러낸 결과물은 뭔가 믿을만하고 진짜같고 과학적인 아름다움이 마치 있는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불필요한 말은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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