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a. 야간 우천시 숲길 동선 개념의 파쿠르니쿠스적 전환
넘을 수 없는 벽앞에 서자 세상이 낯설어졌다. 불이 꺼져 어둑어둑한 숲속 풍경과, 창살 너머로 멀찍이 공원 관리센터 불빛만이 반짝이는 모습이 낯설었다. 꼭 간첩 영화에서 누군가의 눈을 피해 침투하려는 주인공의 입장이 된 것만 같았다. 주인공이 된 순간 내 가방에 든 아이템이 떠올랐다. 길은 다 가까이 있는 법이다. 나에게는 요가 매트가 있다.
요가매트로 담을 넘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 여섯시의 로스앤젤레스. 이제 해가 짧아져 이미 밤이 내린 볼드윈 언덕의 공원이었다.
생각보다 밤이 빨리 찾아온게 문제였다. 원래라면 요가매트로 공원 입구를 지나 저 깊은 숲속에서 요가를 할 참이었다. 그렇게 두 세시간을 보내다 다시 공원을 통과해 지하철을 타는게 보통의 루틴이었다. 그러나 이미 밤은 깊었고, 깊은 밤 공원은 문이 잠겼고, 잠긴 문 주변으로 둘러친 담장 높이는 만만치가 않았다. 잠긴 문을 보고 나서 나는 왜 담장 높이를 살폈을까. 보통은 아쉽지만 돌아서는게 보통일텐데. 아니, 문이 잠겼으면 담을 넘으려는 마음이 드는게 인간의 본능일까.
담장 디자인에 비추어 봤을때 그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담장 맨 윗부분의 만듦새가 그랬다 - 나처럼 담을 넘으려는 사람의 의지를 효과적으로 꺽어놓으려는 디자인으로, 보통 손바닥 너비의 1/3정도 되는 좁은 간격으로, 가는 듯 하면서도 어찌보면 굵다란 철창 가닥들이 박혀있었다. 절묘했다. 창살의 간격부터 살펴보면, 창살 여러 가닥을 한번에 잡을 수 있을만큼 촘촘하진 않고, 창살 사이에 손을 얹을 수 있을만큼 넓지는 않다. 창살의 간격은 창살의 강도와도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즉, 좁은 창살 틈으로 손을 우겨넣을 수 있을만큼 무르지는 않지만, 한 두 가닥을 휘어잡아 내 몸무게를 지탱하기에는 턱없이 약하다.
손을 어떻게 집어놓고 끙끙대며 당겨봐도 내 몸을 끌어 올릴만한 그립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 지금 생각하면 두세 손가락을 집어넣어 지탱할 수 있었을까 싶지만, 돌이켜 보건대 담장의 두께 탓에 손목까지 깊숙히 창살 사이를 지나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창살의 간격이 물론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가 매트가 있다. 폭신폭신한 매트. 아주 얇고 말랑말랑하지만 단순한 고무 재질은 아니라서 꽤나 질긴 바로 그 만두카 요가 매트. 눈에는 눈, 디자인에는 디자인이다. 내 요가매트 디자인의 절묘함도 저 담장 창살 못지 않다. 고무처럼 부드럽지만 섬유 재질이 함유되어 있어 찢어질 만큼 약하진 않다. 자유롭게 접어 말수 있을만큼 얇지만 두어번 겹쳐 놓으면 방탄조끼 저리가라 할만큼 단숨에 두툼해진다.
그렇다. 이제는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비오는 밤, 인적드문 숲 속의 결전이다. 관객은 없지만 대결의 무게는 객석에 비례하지 않는다. 요가 매트야 오늘은 나를 위해 잠깐 변신을 해줘야 하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두세겹 겹겹이 접어 창살 위에 걸쳐봤더니 이건 뭐 철창 덮게 용으로 - 월담 용으로 제작됐다고 해도 믿을만큼 듬직하고 늠름한 것이었다. 이것은 요가 매트인가 파쿠르 매트인가. 자, 이제 드라이 리허설은 끝났다. 본격적으로 내 어깨너비에 맞추어 매트를 다시한번 정갈하게 접은 뒤 담 꼭대기에 올려보았다. 양손을 넉넉한 간격으로 벌려 잡아도 될만큼 푸근한 그립 - 이대로면 담장을 내 쪽으로 당겨 무너뜨릴 수도 있겠다 싶은 망상이 들 정도였다. 이마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이제 파쿠르를 시작한다.
상대는 2.5미터의 장신, 체급이 다르다. 담장의 하체를 노리기로 한다. 담장 바닥에서 1/4지점에 연결된 와이어를 밟고 올라가 매트로 감싼 벽의 어깨죽지를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 잡는다. 그리고 점프 - 허리춤이 담장 꼭대기에 이를 정도로 몸을 끌어올려 빨래 널듯 몸을 담 위에 널어올린다. 푹신한 매트 덕분에 저 뾰족한 창살들이 내 아랫배에 기별도 하지 못한다. 이제 왼쪽 다리를 철책 반대편의 세계로 넘겨 올릴 차례. 그리고는 잠깐 말을 타듯, 자전거를 타듯 담 위에 앉아서 한 호흡을 고른뒤엔 오른발까지 같은 방향으로 넘겨 올린다. 그렇게 다시 몸의 절반을 담장 위에 걸쳐낸다. 이제는 내 하체가 담장 저편을 향해있다는 점에서 파쿠르의 절반은 성공. 마지막으로 한번 더 매트의 그립에 의지해 온 몸을 벽에서 튕겨내듯 점프해 착지하는 것으로 마무리. 몇점일까. 착지하는 다리에 흔들림 따위는 없었다.
하늘의 빗방울이 우레같은 박수처럼 쏟아진다. 옷가지를 단장한 뒤 그 빗방울들을 올려다 보며 답례한다. 마침내 담장 저편에 걸어놓았던 가방을 끌어올려 이쪽으로 넘기는데 아뿔싸 - - - 가방이 거꾸로 뒤집어지면서 핸드폰이 저편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아니야, 그 쪽은 철책 밖이야. 안과 밖의 개념을 건축 학교에서 그렇게나 강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 위치에 따라서 밖이 안이 되기도 하고, 안이 밖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개념적 전환일 뿐 물리적인 덩어리는 안과 밖을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열린 경계를 만들어내는 건축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한밤의 숲 속에서 비 맞으며 담을 넘고 나서야 깨닫는 건축 이론들이라니.
그러므로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짓을 또 한번, 아니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므로 두 번 더 할 수는 없다. 보슬보슬 내리던게 부슬부슬 내리는 비였다. 그렇게 절박한 마음으로 추락한 핸드폰을 보는데 정말로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다행히 낙하 지점이 아주 멀지는 않다! 과연 담장 아래에 공간이 있을까. 살펴보니 철제 담장의 맨 아랫부분은 흙바닥과 어느 정도 틈을 두고 떠있었다. 저 틈으로 내 팔을 집어넣을 수 있을지는 의문, 엎드려 자세히 살펴보니 10센치를 넘어가진 않지만 내 팔 한쪽이 겨우 들어갈 만큼의 공간은 있어 보였다. 물론 상체가 바닥에 닿도록, 후라이팬 위의 납작만두처럼 업드려야 하지만 담을 두 번 더 타는 것에 비하면 식은죽 먹기다.
아니, 그러나 막상 엎드려보니 식은 죽만큼 미지근하진 않았다. 추락한 아이폰이 생각보다 가깝지 않다. 팔을 뻗는데, 조금 더, 조금 더 뻗어도 간당간당,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뻗은 끝에야 한쪽 모서리에 손톱 끝이 닿았고, 마침 그 순간 지우개 따먹기의 왕으로 군림하던 초등학교 시절 그 감각이 살아나 폰 몸체를 또깍, 또 또깍, 또 또깍 튕기듯 당겨오기를 서너번. 그러다 보니 집나간 핸드폰은 다시 내 손 안에 무사히 귀가한 상태였다. 아. 다시 한번, 점잖게 윗옷의 모래 알갱이들을 털어내고, 다시 한번 가방을 챙긴다. 도둑으로 오해받아서는 안된다. 당당하게 걷자.
그러나 각오와 달리 관리센터의 조명이 닿지않는 최대한 어두운 곳으로 몸을 숨기며 걷게 됐던건 또 하나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던가. 그렇게 공원 저쪽편 출구로 다가가는데 이게 왠일인지 방금 넘어온 담보다 50센치는 더 높은 철문이 역시나 닫혀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닫혀있는걸 본 적도 없었으면서 왜 정문은 나지막하다고 근거없는 확신을 품고있던걸까. 아... 이쯤되니 이게 잘하는 짓인가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으나, 회의적인 상황은 회의로서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길을 찾는게 내가 하는 일 아닌가. 공간이 없다면 공간을 발견해내는게 건축가의 일 아니냐는 말. 도둑인지 건축간지 햇갈릴만큼 빠르게 나는 또 한번 문 양쪽의 담장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넓다란 철문 오른편으로 작은 쪽문 같은 것이 보였는데 높이는 비등하지만 잠금장치 같은 것이 발판으로 삼기에 딱 좋은 높이에 달려 있었다. 공간의 발견 - 길은 저기에 있었구나.
요가매트로 파쿠르를 하는 파쿠르 인으로서 바라보는 세계의 길이란, 요가매트로 요가를 하는 일반인으로서 바라보는 세계의 길과는 이렇게나 다른 것이었다. 건축 디자인의 과정에서 동선 설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오늘 담쟁이로서 바라보는 세계는 내가 배운 건축적인 동선 설계가 전혀 통하지 않는 새로운 차원의 동선으로 연결되는 공간이었다. 나는 땅위를 걷는데 그치지 않고, 철제 문 위를 걸어(기어) 올랐고, 담장 위의 그 좁다란 담장을 의자삼아 앉았다가 점프! - 하여 바닥 위의 붕뜬 공간을 걷어(날아) 내려온 것이다.
보통 동선은 플랜(평면도) 상에서만 드러날 뿐 엘레베이션(입면도)에서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 계단이 예외라면 예외일 것이다. - 그러나 오늘의 나 파쿠리언은 입면도의 벽 위를 걸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셉션 주인공들처럼, 마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사들처럼 바닥이 벽이되고, 벽이 바닥이 되는 차원의 전환과 공간의 변이를 몸소 경험했다!
이것으로 어둠과 비와 숲속의 은밀한 두차례의 파쿠르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 하고 결론 내리려 했으나 마지막 착지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멀리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영화는 13구역이 아니라 살인의 추억이었나. 그러나 다행히도 그 형체는 이 동네에 거주하는 아주머니 정도로 윤곽이 잡혔다. 안심이다. 휴. 그러고 나자 반대로 나는 그 사람이 나를 보고 느끼기 시작했을 불안과 위협을 감지하게 됐다.
그렇다, 플랜이 섹션이 되고, 섹션이 플랜이 되는 건축적 전환은 보는이로 하여금 이렇게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혼란과 두려움을 유발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침 같은 쪽으로 걸어야 했던 나는 일부러 아주머니가 꽤나 멀찍이 걸어갈 때까지 기다린 뒤에야 걸음을 떼야했다. 최선을 다해 침착하는 중인듯한 아주머니의 발걸음, 멀찍이 세워둔 자동차에 이르러 문을 열고 몸을 앉히는 아주머니의 모습에 나 역시 안도했다. 그러고 보니 그 자동차는 문을 열어도 조명이 켜지지 않았다. 캄캄한 어둠이었다. 로스앤젤레스의 비오는 밤이 그렇게 깊어간다. 오늘 밤 어둠 속의 요가 매트는 날으는 양탄자에 가까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