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에 다다랐다. 세상의 끝에 다다랐다는 말은 무엇인가의 붕괴를 의미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시카고 다운타운의 호텔방 안에서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밤새도록 들렸다. 그렇다고 바람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 목소리는 내 안의 좌절과 분노의 저변에는, 단단히 굳어진 글쓰기에 대한 어떤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목소리 주인의 20년 전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해서 한 시카고 여행자에게는 현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건지 모르겠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사실에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을때도 있다. 듣자마자 이것은 진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시카고의 겨울을 녹일 정도로 끓어오르는 어떤 것 덕분에 나는 미시건 호숫가를 계속해서 걸을 수 있었다. 오히려 땀이날 정도였다. 하얗고 가느다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건물터에 다다랐을 때까지 그렇게 걷기위한 열기였다. 역시나 이유같은 것의 유무와 상관없이 이곳이 그곳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아차렸을때, 그때가 바로 세상의 끝에 다다랐던 순간이었다. 벽은 다 사라지고 흡사 사람의 뼈대인것만 같은 백골의 빛을 띈 구조체만 남은 건물이 그곳에 있었다. 명백한 사실은 그 위에 지어져 사실을 가려온 생각을 무너뜨리는 힘이 있는걸까. 명백한 사실만 남아있는 그런 장소에 다다랐기 때문에 나는 세상의 끝에 다다랐다고 느낀건지도 모른다.
모른다고 말했지만, 단단한 생각에 단단히 메달려 있을 때에는 모르는 것을 정말로 모르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생각이 사실의 마스크를 쓰고서 마치 사실인척 풍경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것일테다. 사실은 인공적으로 지어진 구조물이면서 마치 태초부터 있어온 땅의 일부인 것처럼, 그런 척 서있는 것이다. 뼈대만 남은 건물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아서 참 좋겠다. 아무리 악명높은 시카고의 바람이지만 저 건물에게는 어떤 위협도 가할 수 없겠다. 왜냐하면 저 건물은 사실인척 위장한 생각을 모조리 훌훌 벗어 던졌기 때문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그러고 보면 사실이 아니라 생각이다. 사실은 때로 오해받거나 위협받을지는 몰라도 흔들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에 반해 생각은 흔들리고, 기울어지고, 위협이라도 받으면 도망가기 일쑤다. 2025년의 마지막 주 — 그렇기 때문에 그날만은 도망칠 수 없었다. 바람만큼 악명높은 범죄의 도시에서, 해가 기울어져가는 늦은 오후, 인적드문 호숫가 생태 보존구역으로 혼자서 걸어들어가면서도 멈추기가 어려웠다. 멈추고 돌아선다고 그게 꼭 도망인 것도 아닌데, 바로 그 시점 그곳에서는 또 그것이, 근거가 필요치 않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멈추고 돌아서는 순간 도망자가 되는 것이라고. 걸어서 걸어서,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서 더이상은 나아갈 길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때까지.
걸어서 걸어서 나아가는 것이 그 지점부터는 자연스럽게 돌아서는 것과 같은 걸음이 되었다. 물가에 잠긴 땅의 궤적을 따라서 걷는 것 뿐이고, 방향은 저절로 스스로 돌아섰다. 걸어서 걸어서 가다보니 이번에는 벽이 없이 홀로 서있는 철문이 보였다. 그날은 그런 날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유를 묻지않고 사실로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그런 날이었던 것이다. 좀전에는 벽이 사리지고 뼈대만 남은 건물을 본 입장에서 이번에는 벽없이 문만 남은 문짝을 마주한다는것이 감정적으로 어떻다 저떻다 할만한 감상을 던져주는 존재는 못되었다. 순수한 사실로서 그 문짝이 호수를 향해 열려있었던 모습만 남았을 뿐이다.
벽도 없는 경계에서 열린 문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람. 그러나 생각해 볼수록 그것은 그럴싸한 세계에 대한 은유다.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사실은 벽으로 둘러쳐져 있지 않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어떤 책이나 마음만 먹으면 빌리든 사든 볼수있는 세계. 궁금하면 대체로 언제나 휴대폰의 AI에게 물어봐 알아낼 수 있는 세계. 어느정도 돈만 있으면 언제 어디든 가고싶은 곳을 향하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는 세계 아닌지. 그렇게 하고 싶은 것들을 그러고보면 막아서는 벽이랄게 마땅히 없는 세계 아닌지. 벽도 없는 저 너머에 우리는 스스로, 문짝 하나만 어색하게 덜렁 세우고 있는건 아닌지. 그리고 꼭 저 문을 통해야먄 저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기로 한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