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일상
Day 6
누군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라고 묻는다면,
혼자 만의 공간(집)이 생겼을 때,
가격을 보지 않고 음식을 시킬 때,
막차시간을 필사적으로 확인하지 않을 때, 라고 말하고 싶다.
오랜만에 서촌에서 마주한 나의 10대.
수술 후 처음이자 퇴사 후 처음이라 바로 전날 무심하게 날라 온 카톡하나에 기다렸다는 듯이 ‘좋아’라는 답을 날렸고, 다른 이들도 나와 비슷했다.
우리는 만나기 전부터 꽤나 스윗한 미션을 부여받았다. 5천원~1만원 쯤으로 꽃을 사 오는 미션.
한송이던 열송이던 상관없다, 본인얼굴에 꽃받침을 하며 ‘내가 꽃이야‘하는 등의 수작은 애초에 금지했다. (금지하지 않으면 왠지 내가 그럴 수도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근데 요즘 5천원 짜리 꽃이 어디 있으랴… 일반 꽃집에서는 구하기 힘들게 뻔했다. 1만원 이하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지만 한송이를 달랑 들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뭔가 그런 날이었다 한 손 가득 꽃을 들고 가고 싶은 날이랄까…
고속터미널 꽃시장까지 갈 생각도 충분히 있었지만, 다행히도 검색했더니 근처에 작은 꽃시장이 있었다. 실제로 갔더니 생각보다 더 작았던지라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가게에서 거베라 10송이 1묶음을 7천원에 구매했다. 스리슬쩍 혹시 이것보다 더 저렴한 꽃이 있는지 여쭤보긴 했으나 역시 없었고 덕분에 색만 살짝 고민하고 빠르게 구매할 수 있었다.
오늘의 날씨에 어울리는 색을 골랐을 뿐인데 한 손 가득 꽃을 들고 가면서 문득 꽃말이 궁금해졌다.
* 노란색 거베라 : ‘긍정, 행복, 에너지’를 상징합니다. 밝고 따뜻한 느낌과 잘 어울리며, 친구나 소중한 사람에게 기쁨과 우정을 표현할 때 적합한 꽃입니다.
이럴수가. 어쩜 이렇게 찰떡같은 꽃을 골랐는지, 발걸음이 더욱 가볍고 마음은 괜히 말랑해졌다.
어쩌면 난 본능적으로 매우 섬세하고 멜랑꼴리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도착해서는 각종 시위 때문에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철역을 걸어 나가며 꽃을 든 내 모습이 이 상황과 매우 대비되는 것 같아서 아이러니하면서 새로웠다. 뭔가 더 당당하게 걸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라 괜히 꽃을 잘 보이게 들고 나왔다. 아마 그날 서촌에서 꽃을 가장 당당하게 들고 다닌 사람이 내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한 카페에 둘러앉았고, 꽃을 대신 케이크를 사 온 한 명을 포함해 총 4명이서 사다리 타기로 스윗함을 교환했다.
난 이런 미션에 굉장히 진심인 편이라 오늘 받는 꽃을 집 화병에 꽂는 것까지 이미 어제 상상을 끝냈는데…
케이크를 받았다.
앗스러웠다.
왜 나에게 케이크가?
케이크를 화병에 꽂아야 할까. 케이크 위에 딸기 장식을 살포시 화병에 올려둬야 할까. 아주 잠시 엉뚱한 고민이 들기도 했지만 아마 그날 서촌에서 케이크를 가장 소중하게 들고 다닌 사람은 내가 아닐까 싶다.
사실 실제로 스윗한 건 케이크니까.
각자의 꽃, 그리고 케이크를 들고 서촌을 누볐다. 작디작은 소품샵들을 여기저기 휘저으며 찰떡같은 콩알 귀걸이를 만나기도 했고, 어디든 웨이팅이 가득해서 하염없이 걷다가 그나마 짧게 기다리는 곳에서 밥을 먹었고, 이 거리에서 유일하게 사람 없는 한 가게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하나 둘 불이 꺼질 시간에 남아있는 재즈바에서 칵테일을 나누었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기에 매번 하는 이야기는 같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기에 일상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린 같은 추억이어도 매번 다르게 즐거워하고, 비슷한 일상 속에서 작은 다름을 발견해하고 신기해한다. 만나면 아직도 10대 시절로 돌아간다는 게 우리가 스윗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술에 취했는지, 이야기에 취했는지, 서로에게 취했는지, 하여간 무언가에 취해 우리는 막차를 놓쳤고 난 택시를 타고 집 앞까지 편히 오며
오늘도 꽤 스윗한 어른으로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