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일상
Day 14
난 비교적 다른 것에 관심이 없는 편인데, 몇 가지 유난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들이 있다.
주기적으로 약간의 변동이 있긴 한데,
그중에서도 지금은 야구다.
야구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건 10년쯤 된 것 같다.
대학생 때 종종 친구들과, 교수님과 야구경기를 보러 갔고, 처음엔 그저 맛있는 걸 먹고 즐기는 게 좋았다면 점차 야구용어, 규칙을 알아가며 경기에 빠져들었다.
심지어는 야구 직관을 위해 회사에 주기적으로 반차를 쓰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서울에 올라오게 되면서 야구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서울 사는 나에게 유일하게 고향의 향을 전해주는 것 같기도 했고, 퇴근 후에 야구경기를 보는 동안 모든 스트레스가 잊히는 듯했다. (물론 경기를 질 때면 또 다른 스트레스가 생기기도 했다.) 서울에는 잠실야구장과 고척야구장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잠실야구장을 처음 가보았다. 나와 같은 고향 출신에 서울로 취업한 친구들과 미리 티켓을 예매해서 갔었는데, 우리 지역 야구장에 비해 체감상 몇 배는 더 크게 느껴졌다. 실제로 크기도 하다. 사람들의 수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게 느껴졌고, 우리는 잠시라도 떨어지면 미아가 된 듯 핸드폰을 붙들고 서로를 찾았다. 처음 서울이라는 어마어마한 곳의 야구장에 방문하는 만큼 꽤 미리 도착해서 줄을 섰지만 경기가 시작한 후에야 좌석에 앉을 수 있었고, 뭐 하나 먹으려면 한 이닝은 포기하고 줄을 서야 했다.
그렇게 잠실을 한 번 경험한 이후로는 집에서 경기를 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각자의 일에 치여 날짜를 맞추기도 힘들었을뿐더러, 다시 그 정신없고 기 빨리는 현장에 갈 엄두가 안 났다. 자리에 앉아서 직관하고 응원하는 건 너무 즐겁지만 거기까지 도달하기가 참 힘들었다. 같이 야구장에 갔던 친구들과 거리가 멀어지면서 연락도 뜸해지게 되었는데 그 친구들 외에는 주변에 야구를 좋아하는 친구가 없어서 한동안 혼자 즐기게 된 탓도 있다. 새 유니폼을 사도 집에서만 보니 몇 개월간 개봉하지 않은 유니폼도 있었다.
그러다가 직전 회사에서 야구광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저 일상 대화 속에서 야구 경기에 대한 답을 잘했을 뿐인데 엄청난 팬으로 소문이 났고, 난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소문이 나니까 내가 정말 엄청난 팬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꽤 뿌듯하기도 했다. 회사 대표님이 굉장한 야구팬이어서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하곤 하셨는데, 난 그에 대해 꽤 답을 잘했다. 어느 선수에 대해 말하면 아 그 선수 잘하죠~ 라든가, 아 어제 엄청 못하던데요. 라든가의 호응이었는데, 야구를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충분히 야구전문가처럼 보였을 것 같다.
어른들과의 공감대가 부족했던 나에게 대표님이 야구팬이라는 점이 꽤 좋기도 했다. 둘이 밥을 먹거나 겹치게 되는 경우에는 어김없이 야구를 소재로 대화를 이어갔다. 침묵을 싫어하는 분이라 어떻게든 이야기를 꺼내봐야지 하는 부담이 있던 나에게 야구는 정말 좋은 소재였다.
서로 응원하는 팀은 달랐지만 각자의 팀이 경기를 이긴 다음날엔 축하해 주었으며, 진 날에는 힘내라는 응원을 건넸다.
올해 야구시즌이 개막했다. 아버지 환갑식사를 하느라 개막전 경기를 챙겨 보지는 못했지만, 틈틈이 스포츠 뉴스를 통해 실시간 점수를 확인했고 몇 번이고 하이라이트 영상을 돌려봤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야구 경기 볼 준비를 했다. 2시 경기라서 준비 시간은 꽤 넉넉했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티비 앞에 자리를 세팅했다.
치킨을 먹을지 피자를 먹을지 고민하며 동네를 나갔는데, 일요일 오전부터 연 곳을 찾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무려 4개의 문 닫힌 치킨집을 돌아다닌 뒤에야 문 열린 곳을 찾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치킨 1마리와 닭똥집 1개를 주문했다. 정확히는 ‘치킨 1마리+닭똥집 1개+매운양념소스 2개+겨자소스 1개+소금 3개+치킨 무 1개‘ 이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편의점에서 무알콜 맥주 3캔과 일반 맥주 4캔을 구매했고, 과자 4봉지도 같이 구매했다. 오늘은 뭔가 유독 큰 맥주잔에 술을 따르고 벌컥벌컥 마시며 경기를 보고 싶은 날이라 집에서 제일 큰 잔을 2개 꺼내어 따랐고 유니폼을 갖춰 입었다.
매일 경기를 보고, 뉴스를 찾아보고, 하이라이트 영상을 돌려보는 것이 일상인 시기가 돌아왔다.
이렇게 진심으로 오래 즐긴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야구가 재미있고 좋다.
회사 생활에서도, 그리고 지금 백수 생활에서도
야구는 언제든 나를 즐겁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