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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지 Oct 26. 2024

우리는 다르게 산다

불행이 불행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 

언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을까 말까. 보통은 상대가 응답하지 않으면 급한 일 아니고서는 여러 번 하진 않을 테지만 언니는 다르다. 전화를 받을 때까지 하는 버릇이 있는데 요즘은 그나마 나아져서 서너 통 정도만 부재중으로 남아있다. 정말 여유가 있을 때 말고는 잘 받지 않지만 그날은 아들 생일이어서 이모가 조카 축하하려나 싶었다.


언니는 생일 파티는 했는지 또 스웨덴에 놀러 온 내 친구와 무엇을 했는지 우리가 다 함께 파리 올림픽은 보고 있는지 많은 것들을 궁금해했다. 아침에 간단한 생일 파티를 했고 친구와는 여기저기 구경 다니며 잘 지낸다고 했다. 올림픽은 티비가 없어서 보지 않고 있다고 말하자 자기가 스웨덴과 한국이 붙는 경기가 있다면 다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럴 필요 없는데 속으로 생각했지만 굳이 내뱉진 않았다. 


나는 전화가 연결된 김에 엄마와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도 손주 생일인데 연락이 없는 게 평소 엄마답지 않아서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물어보던 찰나 언니는 엄마가 아빠와 병원에 갔다고 했다. 


"병원에 왜 갔는데?"


저녁 7시가 넘어가던 한국 시간. 어디가 많이 아프지 않고서야 병원 갈 시간은 아니지 않을까. 예고 없던 정전이 일어난 것처럼 갑작스레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떠오른 건 엄마뿐이었다. 어쩌면 엄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몹쓸 생각을 하면서 밀려들었던 불안감 때문인지 온몸이 떨려왔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머리카락까지 꽉 쥐고서 평소보다 집중해서 들었는데 언니도 유독 이 날따라 말을 잘해서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행이라면 내가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고 또 불행이라면 내 예상에 못지않은 일이 생긴 것이다.


아버지가 시장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전거를 운전하시다 넘어졌는데 다시 타려니 다리에 힘이 빠지셨다고 한다. 간신히 다리와 자전거 끌다시피 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더위 먹었나 싶어서 소파에서 쉬면서 올림픽을 보셨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엄마가 집에 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빠진다는 얘기를 별 일이지만 별 일 아닌 듯이 말했고 그 즉시 엄마는 119에 신고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있다는 게 언니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사실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언니도 더 이상 아는 것이 없었고 설명이 길어질수록 말이 너무 뭉개졌기에 알아듣기 어렵기도 했다. 나는 언니와 전화를 끊고서 카카오톡에서 엄마를 찾아 눌렀다. 언니처럼 받을 때까지 전화하려다 한통만 남겨놓고 기다려보았다. 삼십 분 후, 엄마와 통화는 되었지만 아버지가 좋지 않은 위치에 뇌혈관이 막혀서 중환자실에 있다는 걸 알려주셨다. 그리고 너무 피곤하다며 전화를 끊으시려 했다. 나는 한 가지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어 래퍼처럼 속사포로 내뱉었다. 


"좌뇌예요? 우뇌예요?"


엄마는 우뇌라고 했다. 그 대답을 듣고서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언니랑은 다를 것 같아서. 


불안한 마음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반 친구들 모두 초대한 아들 생일파티가 2주 뒤에 있었다. 게다가 지금 한국에서 나를 보러 와준 친구는 또 어떡하고? 아니면 그냥 친구 따라 같이 귀국하는 게 나으려나? 둘째는 데려가야 할까? 왜 우리 가족은 다 아픈 걸까? 생각해 보니 나 빼고 다 개두술을 했으니 나도 얼른 한국 가서 MRI를 찍어봐야 할까? 걱정이 높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는데 그 파력에 압도되어서인지 잠시 현실감각을 잃고서 멍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며칠이 지나도 생생한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새벽까지 기다리다 엄마와 짧은 통화를 다시 하게 되었다. 엄마는 상황이 좋아질 수도 안 좋아질 수도 있지만 당장 내가 올 정도로 목숨이 위태할 정도는 아니라고 말해주셨다. 이럴 때 나는 어떡해야 할까? 좀 더 있다가 비행기를 타볼까 고민하던 중 재작년 내가 가지 못한 세 명의 장례식이 떠올랐다. 이젠 누군가 세상을 떠나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아주 머나먼 곳에 살고 있는 내가 마치 포승줄에 묶여있는 죄인처럼 느껴졌다. 결국 4일 뒤로 알아보았던 한국행 비행기 예약창을 닫아버렸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아이들 등교를 시키고 친구와 조깅을 하며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일상을 보냈다. 사실 티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써서 그런가 놀랍게도 아버지의 상황을 잠시 잊기도 했다. 친구와 수다 떨며 깔깔거리기도 했고 저녁에 뭐 해 먹을까 메뉴 고민을 한참 하기도 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다가도 그냥 소소한 일을 이어가며 내 안에 숨을 불어넣고 싶었다. 그래야지 좀 살 것 같았다. 


아버지가 병원에 있다는 것은 이로서 우리 가족 모두가 아프게 된 것을 의미했다. 인생 참 지랄 맞은 거 아니냐고 하다가 또 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냐고 아버지의 일은 불행이 아닌 거라고 누군가 내 안에서 말해주었다. 사실 이 중에 어떤 마음을 선택하느냐는 전적으로 내 의지라는 걸 지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사람이 평생 안 아프고 살 수가 있어? 

"아니"

내가 묻고 대답하면서도 왜 이리 슬픈 건지.


우리 가족이 운이 없어서가 아닐 거다. 대형마트 장바구니에 담겨 있는 각자의 물건이 다른 것처럼 딱 그만큼 인생이 다른 것뿐이다. 사는 내내 울기만 한 것도 그렇다고 웃기만 한 것도 아니니 오늘은 기쁨과 슬픔이 함께 온 것뿐이라고. 그냥 오늘은 그런 날인 거다. 


중환자실에서 삼일 만에 나오신 아버지. 일반병실로 옮기신 후 통화를 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와 단 둘이서 이야기하는 게 오랜만이었다. 평소에 서로 전화를 하지 않다 보니 어색하기도 했는데 분명 목소리에 힘이 없었지만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가 맞았다. 


왼쪽 다리와 손이 마비되어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고 소변줄을 차고 있는데 너무 불편하고 거슬린다며 투정 부리던 아버지 특유의 가벼운 말투가 그대로 묻어있어 참 다행이었다. 


"느그 엄마하고 언니 불쌍해서 우짜노"


자꾸 언니와 엄마를 세상에서 제일 가엾은 사람으로 몰아가던 아버지. 왜 엄마와 언니가 불쌍하냐 묻자 이제 그 둘을 돌볼 사람이 없어서 어쩌냐는 거다. 우리 가족은 참 신기하다. 서로 얼굴 맞대고 있으면 싸우기 바쁜 사람들이 또 함께하지 않을 땐 서로의 안녕을 걱정을 하고 있다. 


"불쌍한 게 아니라 그냥 다른 거예요. 이제 아빠도 마찬가지고"


아버지와 나는 왜 불쌍하고 안 불쌍한지 입씨름을 하다가 서로 지쳐서 다음에 얘기하자고 끊어버렸다. 늘 시작은 좋은 마음이었다가 끝은 풀 수 없는 실타래처럼 꼬이고 만다. 그래도 오늘은 아버지가 하나도 바뀐 점 없이 그대로라는 사실에 안도를 하게 된다. 참 인생은 알 수가 없다. 평소에는 그렇게 좀 변하길 바랐는데.  


흐느끼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질 않는다. 희귀병 환자에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는 가족, 평범하게 들리진 않긴 하다. 그래도 난 여전히 우리가 다르다고 믿고 싶다. 그래야 또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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