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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지로움 Nov 13. 2020

저는 아직 준비가 안되었습니다만

엄마가 되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의 시작

연말이 시작되었고, 코로나임에도 수많은 약속이 잡히는 시기가 되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얼굴 한번 보자며 연락이 오가고 달력을 넘기며 일정을 등록한다. 물론 나 빼고. 


모임에 가는 것, 술, 활동적인 것, 운동. 내가 다 좋아하는 것들이다. 엄마가 된 지 이제야 7주가 지났다. 내 안에는 작은 심장이 뛰기 시작한 소중한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지만 나의 사회력은 쇠퇴하는 기분이 든다. 


임신 초기에 동반되는 피로감, 두통, 입덧 이런 것들을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나는 아주 많이 들어 봤음에도 놀랍도록 지배적인 이 증상들에 KO패 당하고 말았다. 5주 차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잠들어 종점을 돌고 다시 동네로 돌아온 적이 있다. 잠깐 잠이 드는 정도가 아니라 전원이 꺼진 상태가 되어 버리는 처음 겪는 내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회사에 임신 사실을 말하지 못했던 어느 날은 퇴근길이 너무 힘들고 고돼서 울먹거리며 집에 도착하자마자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냈다. 어쩌면 지나갈 시간이지만, 나에게는 앞으로의 내 삶이 계속 이렇게 힘들 것만 같아서 서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아기를 낳은 언니들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면 다들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너무 축하해. 그렇지만 언니는 앞으로 고생할 네가 벌써 안쓰럽다'.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다. 언니들의 그때의 나는 그녀들의 힘듬을 상상조차 못 했었다. 그저 조카들이 귀여웠을 뿐..


엄마가 된다는 기쁨이 분명하게 있지만, 그와 동시에 '나'로서의 삶이 끝나는 듯한 무서운 기분에 사로잡힌다. 임신 초기임에도 내 몸이 변하고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내 몸에 대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다. 호르몬에 지배당하고 있으며, 의지와는 다르게 철저하게 늘 패배당하는 내 모습에 무기력감이 생기기도 했다. 


임신은 언제나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일을 점점 내려놓아야 하는 것과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 모두 현실이다. 이렇게 임산부가 되어보니, 워킹맘들이 정말 대단한 존재 같아 보인다. 나는 커리어에서 나의 존재감, 능력을 뽐내며 인정 욕구를 채우며 살아왔다. 밤을 새우며 일을 해도 즐거웠고, 밤 먹듯 하는 야근에도 내가 만들어 낸 결과물을 보며 행복해했다. 나에게 일이란 가장 확실한 보상을 주는 슬롯머신과 같았다. 이제는 슬롯머신과 멀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연애 시절부터 쉼 없이 아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육아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우리는 둘 다 전업주부 엄마손에 큰 아이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주 양육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고, 우리가 낳을 아이에게도 가장 확실한 주 양육자는 부모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우린 엄마인 내가 아기를 키우는 것에 대해 오래전부터 기정 사실화하였다. 나는 프리랜서로도 일하고, 회사보다는 일 자체를 좋아했고, 개인사업을 하고 싶어 했기에 가능한 합의점이었다. 그러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된 퇴사에 대한 카운트 다운은 나의 마음을 여러 번 뒤 흔들었다. 


언제든 일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놓지는 않지만, 내 기량 꺼 마음껏 일하던 때와는 분명 다르겠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아무리 미래에 대해 생각해봤자 기운이 없는 임신 초기 임산부는 오늘도 호르몬에 KO패 당하여 기절하듯 잠이 든다. 



아주 분명한 건 엄마가 되는 것이 싫은 게 아니다. 그저 나는 나를 제일 사랑하는 인간인데, 우선순위가 바뀌는 이 기간에서의 혼동을 겪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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