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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지로움 Apr 02. 2016

다음 선택의 걸림돌

흙수저와 금수저. 그 테두리 밖에서 바라본 삶_1

연일 쏟아지는 뉴스 기사의 헤드라인, 정치인의 선거 피켓, 점심식사 후 우리의 입에 오고 내리는 수많은 이야기 중, 지나가는 외제차 속의 젊은 운전자 등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단어와 그 실상을 마주한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단어이다. '흙수저' 그 단어 하나가 주는 절망적인 메시지와 희망을 앗아가는 탁한 이미지는 정말 최악의 유행어라는 꼬리르 붙여줘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나이가 한두 살 먹어가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날이 달력을 몇 번 바꿔야 할 시간만큼 지나왔다. 난 지방에서 자랐고 그 고장에서 대학교를 나왔다. 더군다나 난 국립대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타고난 금수저는 보지 못하고 자랐고 그 시절에는 나도 꽤 반짝거리는 수저를 입에 물고 있었다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잘 몰랐다. 내 눈에 보이지도 않았고 내 살에 와 닿지도 않았기에 세상은 아름답고 꿈과 희망이 가득해 보였다. 다만 내가 자란 그 작은 고장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렇게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아니 사실 그보다 조금 먼저 서울에 도착했다.




내가 처음 내 손으로 돈을 벌었던 때는 수능이 끝난 직후였다. 아쉽게도 내가 물고 있던 꽤나 반짝거리던 수저는 나의 입시 준비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고 먼지가 많이 묻어 빛을 바란 지 오래였다. 나는 미술을 전공할 수 없었고, 하고 싶던 사진 공부 또한 가슴에 묻어야 했다.


그렇게 미술에 대한 갈증은 고이고이 마음 한곁에 켜켜이 쌓였다. 미대에 진학한 친구가 과제가 너무 힘들다며 푸념을 늘어놓을 때 나는 애써 웃으며 그녀를 부러워했고, 나보다 더 성적이 안 좋았지만 서울로 진학한 친구의 SNS를 보며 서울생활을 염탐하곤 했다. 나는 단순히 서울생활을 시작하면 학생 신분에 돈을 벌며 학교를 다니기 얼마나 어려울지가 무서웠고 막막했다. 그래서 지역의 국립대에서 학사를 마치게 되었다.


대학생활을 하며 여러 번 고민했다. "그냥 부딪치는 게 어떨까? 일단 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 하며 많은 밤을 괴로워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나에겐 그 흔한 서울에 계신 이모, 고모 삼촌도 없었으며 비빌 언덕이라곤 찾을 수도 없었다. 방학 때 친구의 집에 자주 방문하며 서울의 맛을 구경하는 것이 내가 동경하던 것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졸업 전 작은 디자인 관련 회사에 인턴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은 다 알만한 곳이었다. 규모는 작지만 굉장한 파급력이 있는 디자인 교육 전문회사였다. 나는 기획자로 그곳의 일원이 되었다. 작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전공은 상관없다며 열정 있는 사람을 원한다던 대표의 말처럼 다양한 전공의 사람들이 함께 시너지를 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나 신이 났다. 인턴 월급 80만 원으로 시작했다. 그게 나의 공식적인 첫 직장의 첫 월급이었다. 11시에 끝나고 막차를 놓칠까 합정역까지 뛰어가면서도 행복했다. 성질이 우락부락하던 대표의 울부짖음과 비슷한 타박을 듣고도 나는 더 잘할 수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유일한 인턴 동기와 전우애를 느꼈으며, 나의 팀장에게 끝없는 존경심을 표했다.


그렇게 나는 정직원이 되었고, 내 월급은 160만 원이 되었다.

사실 나는 이과 출신이고 생명공학 쪽의 전공을 갖고 있다. 그래서 디자인계열이 돈을 어떻게 버는지 몰랐지만 그 정도 일 줄은 몰랐다. 정직원이 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겠지라는 큰 꿈은 한풀 꺾이게 되었다. 정확히 넉 달 후 파격적인 연봉 인상이 있었지만 여전히 내 실수령액은 200만 원을 넘기지 못했다. 디자인, 문화 산업과 관련된 직종의 어쩔 수 없는 연봉계의 유리천장 같은 것이 존재함을 느꼈다.


나는 돈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 회사를 나오게 되었고 더 큰 범위의 기획을 하는 곳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잡았다. 지금 있는 곳에서 나는 더 큰 격차를 느끼게 되었다. 소위 말하는 금수저와 흙수저, 그리고 그들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서 플라스틱쯤 되는 그런 수저로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느낀 이 양극화의 시작은 그 누구도 아니다. 그저 사람이 갖고 있는 욕망과 그로 인한 부의 축적, 그리고 부를 뺏기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다. 그 마음이 양극화의 시작이다. 지금의 금수저라 불리는 청년들이 질타를 받는 건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청춘이라 힘들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것이 풀리지 않는 콤플렉스가 되어 평생의 한이 되어서는 안된다. 흙수저에겐 다음이 없다. 다음을 돌봐줄 부모님의 재력이 없다는 뜻이다. 누구나 꿈을 꾸고 더 좋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다음이 없다. 내 손에 쥔 현재를 놓고 나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현재에 굶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부유하게 지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지낼 사람들은 굳이 꿈을 꾸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이미 누군가의 꿈인 그 지점에 살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그런대로 살아간다. 그런데 더 잘 살아간다.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여유가 있고, 선택에 대한 어려움이 전혀 없다. 그건 그들이 그렇게 사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모의 능력(재력) 덕분이라 생각한다.


근 몇 년간 일하고, 생활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을 들었다. 그 사이 내 가치관은 그 어느 때보다 큰 폭으로 성장했다 자부한다. 늘 레퍼런스는 고급지고 많을수록 좋다. 그래야 그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최고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좋은 레퍼런스만을 수집한 건 아니지만 달고 쓴 것을 걸러내며 내 것으로 만들고 있다.




나는 여전히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 하지만,

나에게는 내가 만드는 다음이 있기에 희망한다.

내가 개척하고 내가 만든 그 시간의 나는 더욱 값지고 반짝 거릴 거라 믿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래의 나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빛나고 있다.


자괴하고, 힘들어하는 나의 또래의 청춘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지금의 부, 위치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나 또한 나의 결혼이라던지 큰 이벤트를 준비함에 있어 현실의 벽 앞에 가슴이 턱턱 막히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멀리 보았으면 좋겠다. 십 년 뒤의 본인을 그리며, 가장 멋진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을 나를 그리라고 다독이고 싶다.


흙반죽은 불에 구우면 단단한 도자기가 된다.

나만의 스타일로 그 도자기를 칠하고 빛내고 싶다.


누가 만든 내 미래가 아닌

내가 만든 미래 속에서. 빛나는 도자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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