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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 Oct 02. 2020

잔소리는 사랑일까?

레비나스의 '여성적 사랑'이 세상을 구한다

그래서 언니가 엄마 아빠한테 해준게 뭔데?

추석 가족끼리 모인 자리였다. 동생이 이 말을 터트리는 순간, 나는 말이 끝맺을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누르고 있던 화를 폭발하고 말았다. 이전까지는 진학, 취업에서 가족의 기대에 어긋나게 살아본 적 없는 나였다. 따로 떨어져 나와 산지 2년이 되가며, 가계에 보탬이 안되는 불효막심한 죄인이 되었다. 덩달아 결혼 미션을 해내지 못한 것은 가중 처벌의 요인이었다. 내 인생에서는 처음으로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4살 터울의 여자 동생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 조촐한 가족 끼리의 명절 모임에 동생의 남편이 끼면서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동생은 결혼하면서 나와는 다른 단계의 어른이 되었다. 시부모님을 챙기듯 부모님의 추석 선물을 챙기기 시작했다. 동생의 남편은 일찍 집에 도착해서 명절 요리를 도와주었다. 제 몫을 해내는 동생은 당당했다. 그리고 내가 이 자리의 정당한 값을 지불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동생의 반복되는 입바른 소리에 나는 밥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명절 때 가족끼리 싸움이 난다는 이야기가 뉴스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다. 나만의 공간으로 도망가서 무방비하게 쉬고 싶었다. 그 조차도 불효의 덕목이라 비난 여론은 더욱 거세졌다. 그때 엄마만이 내 불편한 감정을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감싸 주었다. 발목에 묶여있는 쇠고랑이 풀린 기분이었다. 나는 엄마의 도움을 받아 도망치듯 집에서 나왔지만, 택시 안에서 나를 보내는 엄마의 마음이 느껴지면서 코가 찡긋했다.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환대하는 사랑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연속이고, 휴전할 수 있는 방법은 상호 균형을 이루는 트레이드라 생각해 왔다. 분명 내가 설정한 세계관에서 나는 도둑놈이 맞다. 동생의 말처럼 부모님께 받은 사랑에 대해 페이백하지 못하고 부채가 잔뜩 쌓여있는 것이다. 억울하지만 투쟁의 세계관에서 나는 배신자이다. 


 "내가 너를 이만큼이나 사랑했는데,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 또한 연인간의 사랑에서 이런 사랑의 트레이드 관계를 따졌다. 상대의 마음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부채 의식을 심어준다. 상대는 숨이 막혀서 도망갈 구멍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어제 밤 그랬듯 말이다.


그러나 엄마의 사랑은 달랐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엄마는 나를 조건없이 우선 환대했다. 거기에 나의 장소를 마련하도록, 당신의 장소를 비워주었다. 엄마의 욕망을 위한 능동성의 발현이 아니라, 당신의 욕구를 포기하는 사랑을 베풀었다. 엄마의 '여성적 사랑' 덕분에 투쟁 관계를 초월하는 사랑받는 느낌을 마주한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나를 수축하면서 발현하는 환대'를 여성적 사랑이라 칭하였다. 


레비나스가 '여성적'인 것이라 부르는 것은 생물학적 성별과 상관없이, 존재론적인 여성성인 것이다. 그리고 한 인간에게 동등하게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동양의 음과 양의 조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아닌 호전성과 수용성이라는 용어는 어떠할까.


투쟁이 끝난 풍요로운 미래는 여성성에 달려있다.


잠시 내가 주고 받았던 사랑으로 시선을 돌려 본다. 나는 20대 연인 관계에 있어서 늘 다양한 옵션을 준비하고 상대를 경쟁시켰다. 그러다 둘만의 단계로 들어섰다 믿었는데, 상대의 사랑이 나만큼이지 않음에 크게 분노했다. 그렇게 시작된 시시비비는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투쟁의 역사를 남겼을 뿐이다. 이 모든 투쟁과 상처를 거치고 나니 레비나스의 '타자성과 초월'이라는 철학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당신이 '내가 이 사람을 진정으로 좋아하는구나' 하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요즘 나도 엄마가 보여줬던 사랑처럼, 나를 수축하면서 누군가를 환대하고 있다고 깨달았다.

종종 나와 전혀 취향이 안 맞아도 좋아하는 척 아카데미급 연기력을 발현할 수 있을 때

서로 기싸움 하다가 혹시나 상대가 상처 받을까봐, 차라리 내가 상처받는게 낫다고 생각할 때

언젠가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나의 소유욕을 철회해야 한다고 다짐할 때


투쟁하는 삶에 익숙했기에 처음에 이 감정들이 굉장히 불편했다. 아직도 이따금 내 안의 남성성이 깨어나 투쟁의 모드를 가져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느낀다. 물론 먼저 창을 거두고 우정과 아량을 보이는 것이 꼭 내쪽에 없다고 반박할 수 있다. 왜 미덕이 나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고, 타자에게는 우선적으로 요구되지 않느냐며 말이다. 


하지만 사랑은 기원적으로 불평등성을 품고 있다. 타자는 항상 나와는 다른 높이에 위치하고, 결코 나와 동일한 수준에 있지 않다. 레비나스는 '자발적인 물러섬', '나의 장소를 내주는 환대'만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끝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대지의 찬탈이 정지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빛으로부터 벗어나 장소를 비워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할 권리, 대지를 점유할 권리를 소리 높여 주장하는 일을 그만두고, 나의 욕구를 위한 권리 청구를 자주적으로 철회하는 것. 그것 이외에 투쟁의 드라마를 끝낼 방도는 없다.


자기만 온갖 화려한 색채를 두르려는 인간의 이기적 행태 속에서 '타자를 꼭 끌어안는' 레비나스의 목소리는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언젠가는 조금 더 성숙된 인간들이 이 거친 세상에서 더 많은 지분을 혹은 조금 더 넓은 영토를 갖게될 날이 올 것이다. 엄마 고마워요.


물론 명절 잔소리에 시달리는 자식들이여, 당신이 먼저 여성적 사랑을 발현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잔소리를 스스로를 수축해서라도 받아들여 보세요. 내가 먼저 나의 자리를 비워서라도, 먼저 부모님의 자리를 마련하고 환대해주세요. 우리가 늘 받아왔듯이요. 저도 내년부터는 그러겠습니다(..)



https://bit.ly/33jzM3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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