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이어, 강미선 유니버설발레단 수석 무용수와의 인터뷰 비화. 중간쯤 읽다 보면 취미리나/리노들에게 전하는 그의 메시지도 있다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완벽한 턴아웃에 트리플 피루엣을 돌았을 것 같은 강미선 수석은 어떻게 발레를 시작했을까. 시작은 우연이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동네 무용학원에 가게 된 게 시작이었어요. 언니들이 토슈즈를 신은 걸 봤는데, 재미있어 보이는 거예요. 발레는 계속하면 테크닉 난이도가 올라가잖아요. 파세를 해낸 뒤엔 를르베(뒤꿈치를 든 채 밸런스)를 하고 파세를 하고, 싱글 턴을 돈 뒤엔 더블 턴, 이어 (32회전) 훼떼 턴까지 이어지니까요. 그래서 저는 발레가 재미있었어요. 그러다 UBC와 선화를 알게 됐죠.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보며 '아 나는 커서 UBC에 와야겠다'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출처 및 저작권: 강미선 무용수 인스타그램
유학도 가고 싶었을 텐데요. "네, 선화에 있으면서 유학도 가고 싶은 생각도 했죠. (미국 워싱턴DC) 키로프 발레 아카데미 가고 싶었지만 형편이 안 되어서 안 되겠다 싶었는데, (1997년 경제위기) IMF 사태가 터졌죠. 그런데 6학년 마치고 공연을 했는데 발레단 총재님께서 유학 권해주셔서 갈 수 있었어요. 그때 유학을 못 갔으면 바로 고교 졸업하고 UBC 입단하려고 했었죠."
유학하며 해외에서 활동하고 싶은 생각도 자연스레 있었을 거고요. "해외는 아무래도 레퍼토리가 다양하고 모던 장르도 많이 하니 해보고 싶긴 했죠. 그런데 용기가 없었어요. 저는 계속 스스로가 한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좀 더 실력을 쌓고 나가자, 그렇게 생각했죠. 보완을 하고 도전하려 했지만 결국, 못 갔죠."
후회는 없나요. "음...사실 후회라고 한다면 글쎄요. 아예 진짜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갔다면 달랐겠죠. 그런데요, 그냥 그런 얘길 해요. 만약 유학을 어린 시절 나가서 해외에서 활동했다면 남편도 못 만나고, 제 아이도 못 만났을 거잖아요. 제 인생의 너무도 소중한 부분인 데 말이죠.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요. 밖에 나갔어요 채워지지 않는 뭔가는 있었을 거라고요. 제가 있는 곳, 한국에서, UBC 안에서 행복하게 더 잘하면 되는 것 같아요."
이제, 완벽하게 이해된다. 문 단장이 "미선이라면 해낼 겁니다"라고 확언한 이유. 다시 '잠미녀' 오로라 강미선 수석으로 돌아가보자.
결국 해낸 오로라 데뷔, 어떠셨나요. "(눈동자가 커지며) 엄청 떨렸어요. 굉장한 긴장감이 있었죠. '돈큐(돈키호테)'나 '지젤' '백조(의 호수)' 등은 계속해왔던 거지만 '잠미녀' 주역은 처음이잖아요. '데뷔'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그 떨림을 참 오랜만에 느꼈어요. 2009년 '호두까기 인형' 자선공연에 주인공으로 선 게 첫 주역 데뷔였는데, 그 느낌을 다시 받았습니다. 스무 살 초반의 미선이로 오로라가 절 데려다주는 것 같았어요(웃음). 그래서 (마린스키 수석 무용수 출신으로 UBC 지도자인) 마야 (둠첸코) 선생님께 도움을 청했죠. 마야 선생님은 마린스키 현역 시절 '잠미녀'도 하셨고요. 저로서는 큰 행복이자 행운이죠."
둠첸코 선생님이 뭐라고 지도해 주셨나요. "꾸미지 말고, 내추럴하게 하라고 하셨어요. 제가 나이가 있는데 10대 소녀 오로라를 춰야 하니 걱정이 됐거든요. 그 마음을 읽으신 거죠. '어려 보이려고 노력하지 말라'라고 하셨어요. 천진하게 연기하려고 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요. 그냥 자연스럽게 시선, 폴드브라 하라고 해주셨고, 그게 큰 도움이 됐어요."
중앙일보 장진영 후배의 멋진 사진들. 저작권 중앙일보 장진영
강미선 수석 인터뷰 과정의 감동 포인트 중 하나는 그의 솔직함이었다. 출산과 나이 등에 대한 그의 답이 그러했다.
적지 않은 나이라 더 고민됐겠어요. "사실, 젊은 나이가 아니니까요. 서른 후반 되면 많이들 은퇴를 고민하고요. 제가 스무 살에 입단했을 땐 그런 공식이 있었어요. 결혼=퇴단, 임신=퇴단이요. 저는 그런데 나이도 그렇고, 아이도 낳았고, 두 가지가 겹쳐지는 시기였기에 걱정이 많았죠."
몸이 자산인 무용수인데, 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어땠나요. "임신하고 몸을 꾸준히 풀어주긴 했어요. 복귀 때 도움이 많이 됐죠. 임신했다고 그만 둘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발레단의 (손)유희, (한)상이 후배들이 출산하고 멋지게 복귀한 걸 보고 용기를 내기도 했어요. (같은 유니버설발레단의 이현준 수석무용수와 부부인) 유희는 쌍둥이를 뒀잖아요. 육아 선배님들 진짜 대단합니다."
쉽진 않으셨을 듯요. "빨리 복귀하려면 몸을 계속 움직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출산하고 보니 몸(컨디션)이 여전히 안 올라오더라고요. 대표적으로, 허리가 굳더라고요(얕은 한숨). 골반도 말리고, 허리도 잘 안 늘어나고. 허리가 제일 먼저 굳었어요. 안 꺾이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안 꺾이면...어쩌겠어요, 꺾어내야죠. 스트레칭은 하는 만큼 늘어나더라고요. 어릴 때는 쭉 하면 부드러워지는데, 안 쓰니까 확 굳는 거죠. 조금씩 매일 각도를 늘려갔어요. 꺾어지더라고요. 스트레칭은 역시 쉬면 안 되는구나, 느꼈죠. 대신 몸 상태를 봐가며 부드럽게 했어요. 사실 근데 힘들긴 하네요(웃음)."
강미선 무용수와 남편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무용수. 사진 출처 및 저작권 강미선 무용수 인스타그램
아드님(레오)도 발레한다고 하면 어떨까요? "(환히 웃으며) 와, 글쎄요. (고개를 흔들며) 그런데요, 예를 들어 (영국) 로열발레단 갈 정도 실력 아니면 시키지 말자고 남편과 얘기하곤 해요(웃음). 그런데 남편도 부모님이 무용수이셨기 때문에 춤추시는 걸 보고 자랐거든요. 저희 아기도 엄마와 아빠가 무대에서 춤추는 모습을 기억해줬으면 해요. 그런데 그러려면 아기가 아직 너무 어리네요(웃음)."
발레 공연은 대개 만 7세 이상부터 관람 가능하다. 강 수석이 5년 정도는 더 무대에 올라야 한다는 셈이 나오는데. 그는 나이에 대해, 은퇴 가능성에 대해 에둘러 이렇게 말했다. "나이를 생각하면 더 이상은 욕심을 부리거나, 뭔가 더 판타스틱한 걸 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난 것 같아요. 확실히요. 어느 무용수들이든 다 그렇게 말하지만, 가장 좋을 때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건 염두에 두고 있어요.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알고는 있거든요. 언제든, 체력적이나 심리적으로 어렵다고 생각이 될 때는 천천히, 내려올 준비를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일단 어떤 역할이든 주어지는 걸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강 수석의 은퇴는 그러나 당분간은 없을 듯하다, 다행히도. 아직 오르고 싶은 무대가 많다. 아래 문답을 보자.
무용수로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일까요. "음...꿈꿨던 역할을 했을 때요. 저는 수석무용수 같은 포지션에 대한 욕심은 없었어요. 대신 역할, 캐스팅은 해보고 싶은 게 많았죠. '수석이 될 거야'라기 보단, '나 저 작품, 그 역할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내왔어요. '오네긴' 타티아나 역할이 그랬죠. 생각지 못했는데 지목이 되어서 부담감도 컸지만 굉장히 좋아하고 너무도 열정을 쏟아붓게 되는 역할이에요. 또 '로미오와 줄리엣'도 어릴 때부터 너무 좋아했고요. 케네스 맥밀란 경 안무 버전으로 무대 올랐을 땐 '와 내가 이걸 드디어 해보는구나' 싶어서 신났고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아쉬워요. 어떤 버전이어도 상관없으니 다시 꼭 해보고 싶어요. (재독 무용수 겸 안무가) 허용순 선생님 작품도 모두 좋아하고요. 또 UBC의 창단 작품이 '신데렐라' 였거든요. 이 무대도 다시 꼭 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취미리나/리노들에게 그리고 후배 무용수들에게 강 수석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먼저, 관객과 꿈나무 무용수들에게. "저를 기다려주시고, 공연에 오셔서 격려해 주시는 분들께 일일이 감사 인사를 못 드리는 게 죄송할 정도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남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기억될 수 있도록 할게요. 그리고, 발레를 꿈꾸는 어린 친구들도 응원하고 싶어요. 요즘 예쁘고 잘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깜짝 놀랄 정도랍니다. 힘든 시간이 있어도 자신을 믿고 열심히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취미 리나/리노들에게. "요즘 성인분들의 취미발레일상을 자주 보게 되는데요 저는 항상 그분들이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을 합니다. 발레로 지친 일상의 스트레스도 푸시고 아름다운 몸선도 만드시고 또 발레를 하며 건강을 되찾으셨다는 분들도 만났어요. 제가 매일같이 하는 발레가 누군가에게 이렇게나 큰 긍정의 에너지를 불러들인다는 건 정말 신기했어요. 연습 때나 공연 때 힘들다 생각했던 제가 부끄러워지기도 했고요. 어마어마한 긍정의 힘을 갖은 발레를 매일 하는 저는 행복한 사람이다 라는 생각도 들어요. 각박하고 지친 현실에서 발레를 하는 순간은 행복한 세계에 이끌려 아름다운 발레리나가 되시는 여러분들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후배 무용수들에게. "미안하고 아쉬운 게요, 지금 발레단에도 오랜 기간 같은 자리를 지켜주고 있지만 기회를 못 갖는 친구들이 많아요. 발레단이 너무 없고, 무대에 설 수 있는 시간도 팬데믹 때문에도 줄었었고, 너무 안쓰러웠어요. 그래도 팬데믹 후 상황이 나아지고 있고 여러 방안들이 생기고 있으니 다행이에요.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어요. 주저하지 말고, 문을 많이 두드리면 좋겠어요. 저는 UBC 한 곳에만 있었고, 마음만 해외에 나가고 싶었지만, 진출을 하고 싶다면 더 지체하지 말고 여러 문을 두드려보길 바라요. 지금이 가장 어리잖아요. 여러 문을 두드린다고 다 열리진 않겠지만, 어딘가는 열릴 거예요. 그리고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더 많은 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해요."
이 말을 들으면서 왠지 울컥했다. 무용수뿐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 아닐까. 희망과 절망 사이, 현실과 이상 사이, 꿈과 일상 사이에서 괴로운 우리 모두에게.
발레라는 잔인한 아름다움에서 일가를 이룬 그가 들려준 이야기엔 깊은 울림이 있었다. 강미선 무용수와 콘스탄틴 무용수 부부의 아들, 레오가 엄마의 무대를 보며 자신의 꿈을 키워갈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응원한다.